■ 눈 감으면 보이는
■ 겨울행 / 이근배
1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2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당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꺾던 눈밭의
당신의 언 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 함동선
또랑 물에 잠긴 달이
뒤돌아 볼 때마다 더 빨리 쫓아오는 것처럼
얼결에 떠난 고향이 근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잠깐일 게다, 이 살림 두고 어딜 가겠니,
네들이나 휑하니 다녀 오너라’
마구 내몰다시피 등을 떠미시며 하시던 말씀이
노을이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창가에
초저녁 달빛으로 비칩니다
오늘도 해동갑했으니 또 하루가 가는가
언뜻언뜻 떨어뜨린 기억의 비늘들이
어릴 적 봉숭아물이 빠져 누렇게 바랜 손가락 사이로
그늘졌다 밝아졌다 그러는 고향집으로 가게 합니다
신작로에는 옛날처럼 달맞이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 피어 있었습니다.
길잃은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무릎을 접고 앉았다가
이내 별들이 묻어올 만큼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다가 면사무소 쪽으로 기어가는 길을 따라
자동차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동구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온 마을 개가 짖는 소리에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손 안 닿은 곳 없고 손닿은 곳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세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 2021.05.10 편집 택
'[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감상] '어머니 기억' 신석정, '오월의 어느 날' 목필균, '오월의 시' 이문희 (2021.05.11) (0) | 2021.05.11 |
---|---|
[명시감상] '못 위의 잠' 나희덕,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승하 (2021.05.10) (0) | 2021.05.10 |
[명시감상] '파주에게' 공광규, '철조망에 걸린 편지' 이길원 (2021.05.10) (0) | 2021.05.10 |
[명시감상] '오월 어느 날' 목필균, '5월의 시' 이문희 (2021.05.02) (0) | 2021.05.02 |
[명시감상] '이웃' 이정록 (2021.04.25) (0) | 2021.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