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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성당의 스팬드럴과 진화론' 이종필 건국대 교수 (2021.03.26)

푸레택 2021. 3. 26. 09:46

[사이언스N사피엔스]
■ 성당의 스팬드럴과 진화론 / 이종필 건국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로 유명하다. 베네치아는 동화 속 상상의 도시가 현실의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도시이다.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관광객이 거의 없지만 예년 같으면 연간 관광객이 무려 2천만 명을 넘어 골목길마다 외지인으로 넘쳐나는 곳이 베네치아이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산마르코 광장이다. 광장에 우뚝 솟은 종탑은 갈릴레오가 400년 전에 처음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들고 올라간 곳이다. 종탑 맞은편에는 산마르코 대성당이 있다. 832년 첫 헌당식이 있었고 976년 화재로 불탄 뒤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기 시작한 것은 1063년이었다.

산마르코 대성당이 종교나 건축이 아니라 20세기 생물학에서 유명해진 것은 미국의 위대한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 때문이다. 굴드는 진화생물학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음악, 건축,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박식함을 뽐낸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1941년생으로 2002년 생을 마감하기까지 22권의 저서와 약 500편의 논문, 그리고 수많은 에세이를 남겼다.

굴드는 진화론을 둘러싼 거의 모든 이슈에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대표적으로, 자연선택에 의한 생물의 적응이 형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적응이란 생물이 생존에 유리하도록 환경에 맞게 변화하는 과정이다. 한쪽 극단에서는 생물의 모든 형질이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를 적응주의라 한다. 다른 극단에 있던 사람이 굴드였다. 굴드는 많은 형질이 진화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적응주의에 따르면 어떤 생명체의 모든 형질은 그 생명체가 살고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에 적합하도록 자연선택된 결과이다. 적응주의의 설명방식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코는 안경을 걸치기 위해 진화했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물론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굴드가 산마르코 대성당을 진화론에 끌어들인 것은 적응주의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산마르코 대성당처럼 돔형의 건축물을 지을 때 기둥 위에 아치를 세우고 돔을 올리다보면 아치와 돔 사이에 홀쭉한 삼각형 모양의 휘어진 면이 생긴다. 이 면을 ‘스팬드럴(spandrel)’이라 하는데 아치 위에 돔을 올리는 건축물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부산물’이라는 게 굴드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성당을 만든 사람들은 스팬드럴을 그냥 비워두지 않고 그 공간에도 그림이나 조각을 장식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스팬드럴은 성당의 아름다움을 최선으로 완성하기 위해 처음부터 고안된 공간이 아니다. 그저 건축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원래의 목적과 전혀 상관이 없는 뜻하지 않은 기능이나 효용을 갖는다는 게 중요하다. 확실히 안경받침대로서의 코는 진화의 뜻하지 않은 기능이다. 생명체의 많은 형질이 스팬드럴처럼 그저 진화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굴드의 요지이다. 굴드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언어도 직접적인 자연선택의 결과라기보다 뇌가 커지면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여긴다. 

굴드는 리처드 르원틴과 함께 1979년 《산마르코 대성당의 스팬드럴과 빵글로스 패러다임》이라는 논문을 써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빵글로스는 볼테르가 1759년에 쓴 풍자소설 《깡디드》에 등장하는 선생님이다. 깡디드는 세상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최선으로 주어졌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굴드와 르원틴은 적응주의의 논리가 깡디드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봤다. 즉, 적응주의자들도 생물의 모든 형질은 자연선택에 의해 가장 최선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련한 적응주의자여, 산마르코 대성당의 스팬드럴을 보라. 이는 엄연히 건축 상의 부산물이지 않은가! 

굴드와 르원틴의 스팬드럴 논문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저기서 부산물로서의 스팬드럴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스팬드럴의 비유는 스팬드럴에만 멈추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하철 종로3가역에는 1호선, 3호선, 5호선의 세 노선이 지나간다. 종로3가역의 1호선에서 5호선을 갈아타려면 환승통로를 따라 북쪽으로 상당히 먼 길을 걸어가야 한다. 적응주의의 논리로 설명하자면, 환승거리가 길어야 사람들이 더 많이 걷게 되고 따라서 이용객들의 건강에 더 좋기 때문에 1호선과 5호선이 그렇게 멀어졌다는 것이다. 

생물학 논문 제목에 산마르코 대성당과 소설의 등장인물까지 끌고 들어온 굴드의 천재성과 화려한 언변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전혀 빈틈이 없어 보인다. 당연히 코는 안경을 걸치기 위해 진화하지 않았고 종로3가역의 긴 환승통로는 이용객의 걷기운동을 위한 결과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십자포화를 받은 적응주의자들은 별다른 대응책이 없었을까?

우선은 굴드의 용어선택에 대한 가벼운 반격이 있었다. 굴드가 스팬드럴이라고 지목했던 산마르코 대성당의 아치와 돔 사이의 공간은 엄밀히 말해 스팬드럴이 아니라 펜던티브(pendentive)이다. 속이 빈 반구형 구조물을 바닥에 엎어 놓고 밑면에 정사각형이 되도록 수직으로 절단해 낸다. 그러면 잘라낸 네 면은 아치모양이 될 것이고 정사각형의 꼭지점에는 절단되고 남은 반구의 귀퉁이가 남는다. 다시 반구의 위쪽 구면을 수평으로 잘라내고 그 위에 돔을 얹는다. 이제 반구에서 남은 부분은 정사각형을 이루는 네 귀에서 뻗어 나온 오목한 삼각포물면 네 개다. 이 부위를 펜던티브라고 한다. 펜던티브는 비잔틴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그 구조물도 스팬드럴이 아니라 펜던티브이다. 

그렇다면 스팬드럴은 무엇일까? 스팬드럴은 평면 모양의 아치가 연이어 있을 때 아치와 아치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펜던티브와 다른 점은 펜던티브가 3차원의 삼각곡면인 반면 스팬드럴은 2차원 삼각평면이다. 물론 펜던티브를 3차원 스팬드럴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는 스팬드럴이든 펜던티브든 건축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본질적인 반론은 이렇다. 첫째, 대니얼 데닛은 굴드의 스팬드럴에 대해 그 또한 선택의 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돔을 올리는 방식에는 펜던티브 양식만 있지 않다. 코벨이나 스퀸치 양식도 있다. 이들 양식에서는 펜던티브 같은 삼각곡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산마르코 대성당의 펜던티브는 나름 건축가들의 미학적인 또는 구조적인 가치 때문에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데닛은 이를 ‘강제된 조치’라 불렀다.

물론 산마르코를 세운 건축가들이 펜던티브 자체의 미학적 기준을 중심에 두고 펜던티브 양식을 선택했는가, 또는 아예 건축물의 구조적인 안전성 등의 이유로 선택했는가 등에 따라 펜던티브가 여전히 어떤 다른 목적의 부산물일 가능성은 남아 있다. 

둘째, 굴드가 공격했던 극단적인 적응주의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형질이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의 결과라고 믿는 적응주의자는 없다. 적응주의자들도 적응의 부산물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현실의 적응주의자들은 대부분 ‘세련된 적응주의자’들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굴드는 현실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공격의 대상을 창조해 냈거나, 극히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을 마치 전체의 입장인 양 성급하게 일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20세기 적응주의의 큰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조지 윌리엄스는 1966년 《적응과 자연선택》에서 “적응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특별하고 번거로운 개념”이라며 오히려 ‘적응 만능주의’를 경계한다.

《적응과 자연선택》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조상격이라 할 수 있는 저작으로서 적응이 유전자의 이득을 위한 진화라고 설명한다. 자연선택의 수준이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은 최소한으로 최후의 수단으로써만 사용돼야 하며 무분별하게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적어도 적응주의의 원조는 ‘세련된 적응주의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단위가 유전자로 내려가고 그것이 도킨스에 이르러 ‘이기적’이라는 탈을 쓰게 되면서 문제가 다소 복잡해졌다. 유전자가 ‘선택’되는 것과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 다른 수준의 문제이긴 하지만, 선택된다는 사실 자체가 우월적 지위를 부여하는 효과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기적 유전자》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윌슨의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1975)은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열었는데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동물행동을 다루었다. 여기에는 인간의 행동도 포함돼 있어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즉,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행동을 설명한다면 결국 유전자가 인간을 결정한다는 결론으로 빠지지 않느냐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과학자들의 뇌리 속에는 우생학 등 ‘나쁜 과학’의 기억이 남아 있다. 사회생물학이 세상의 불공평이나 차별을 유전자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는 비난은 어쩌면 당연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선봉격이었던 사람이 하버드 대학의 윌슨과 같은 건물에 있었던 굴드와 르원틴이었다. 이들은 유전자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환경과의 상호작용 등을 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의 스팬드럴 논문은 윌슨을 위시한 사회생물학에 날린 기막힌 일격이었다.

분야를 막론하고 천재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대상들 사이의 본질적인 연결점을 꿰뚫어본다는 점이다. 세상에, 진화론에 성당의 스팬드럴이라니. 그러니까 천재란, 우리에게 익숙한 ‘선행학습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남들이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대상도 한 번 더 돌아보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이런 면에서 스팬드럴 논문은 좋은 글쓰기의 사례이기도 하다. 글 쓸 거리가 없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성당의 스팬드럴을 보며 엉뚱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 한번 돌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출처] 동아사이언스-사이언스N사피엔스 (2021. 02. 18),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 필자 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 2021.03.26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