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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유전물질의 정체가 드러나다' 이종필 건국대 교수 (2021.03.25)

푸레택 2021. 3. 25. 17:48

■ 유전물질의 정체가 드러나다 /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 교수

1877년 프레더릭 그리피스와 같은 해에 태어난 오즈월드 에이버리가 그리피스의 폐렴구균 형질전환 소식을 들은 것은 그의 나이 56세이던 1933년이었다. 20세기 초반에는 물리학이든 생물학이든 대체로 젊은 과학자들이 눈부신 성과를 낸 것에 비하면 에이버리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자기 연구의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에이버리의 논문이 나온 것은 1944년이었다. 당시 에이버리는 록펠러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에이버리가 한 일은 한 마디로 그리피스의 폐렴구균 실험을 좀 더 정밀하게 시행한 것이었다. 우선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확인했다. 즉 독성이 없는 R균과 독성이 있으나 죽은 S균의 잔해를 섞어 쥐에 투입한 결과 R균이 S균으로 바뀌는 형질전환을 확인했다. 에이버리는 영리한 실험으로 형질전환의 원인물질을 추적했다. 만약 죽은 S균의 잔해에서 형질전환의 원인물질 X를 제거한다면 R균은 결코 S균으로 형질전환하지 못할 것이다. 에이버리는 콜린 매클라우드 및 매클린 매카티와 함께 열처리한 S균에서 X의 혐의가 있는 물질들을 하나씩 제거하여 시험관에 넣고 여기에 R균을 투입해 형질이 바뀌는지 확인했다.

S균은 다당류 캡슐이 겉을 둘러싸고 있다. 혹시 당이 형질전환 물질이 아닐까? 아니면 그냥 S균의 당을 흡수해 R균의 외피를 덮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은 S균의 잔해에서 당을 없애고 R균과 섞었다. 그 결과, 여전히 R균의 형질이 변했다. 따라서 당은 형질전환과는 상관이 없다. 에이버리는 이런 식으로 지방, 단백질, RNA를 하나씩 제거하고 실험을 반복했다. 남은 것은 RNA와 함께 세포핵 속에 들어 있는 핵산인 DNA. 놀랍게도 가장 범인이 아닐 것 같은 DNA가 형질전환의 주범이었다! S균의 잔해에서 다른 모든 후보물질들을 제거했을 때에는 여전히 형질전환이 일어났지만 DNA를 제거하자 형질전환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형질전환의 원인물질은 DNA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당시에는 DNA나 RNA 같은 핵산보다는 단백질이 유전물질의 후보로 훨씬 더 각광을 받았다. 단백질은 익숙하기도 하고 종류도 많고 생물체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핵산은 말 그대로 세포핵 속에 있는 산성의 물질(nucleic acid)로서,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셸이 처음 발견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DNA는 그저 “멍청한 분자”일 뿐이어서, 에이버리의 실험결과에도 불구하고 DNA를 유전물질의 실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과학자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후속연구들은 점점 DNA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의 1951년 실험은 인상적이다. ‘허시-체이스’ 실험은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실험이었다. 박테리오파지는 바이러스 중에서 숙주가 박테리아, 즉 세균인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와 세균은 모두 미생물이지만 바이러스가 세균보다 크기가 수십 배 내지 백 배 정도 더 작다. 세균은 스스로 물질대사를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생물체인 반면 바이러스는 그렇지 못해서 항상 숙주에 기생해서만 살 수 있다.

유전학 연구에서 박테리오파지의 중요성을 처음 알아본 것은 독일 출신의 생물학자인 막스 델브뤼크였다. 델브뤼크는 학문 경력이 아주 이채로운 과학자이다. 괴팅겐 대학에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했으나 박사학위는 이론물리학으로 받았다. 1930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영국,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덴마크의 닐스 보어를 만나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양자역학의 태두였던 보어에게서 생물학의 영감을 얻은 것이 흥미롭다. 보어는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적인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이 점이 델브뤼크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델브뤼크는 1932년부터 베를린의 카이저빌헬름연구소에서 리제 마이트너의 조수로 일했다. 1932년은 영국의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한 해였다. 중성자는 전기전하가 없기 때문에 전기적으로 양성인 원자핵을 탐색할 때 아주 쓸모가 있다. 당시 과학자들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 우라늄보다 무거운 초우라늄 원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마이트너도 오토 한과 함께 초우라늄 연구에 뛰어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우라늄 원자핵이 쪼개지는 핵분열 현상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때가 1938년인데 델브뤼크는 그 전해인 1937년에 나치 치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카이저빌헬름연구소 시절에 물리학 관련 논문도 썼으나 1933년에 이미 방사선에 의한 초파리의 돌연변이 연구진에도 참여했고 1935년에는 '유전자 변이 및 유전자 구조의 성질'이라는 주목할 만한 논문도 썼다.

여기서 델브뤼크는 분자의 관점에서 유전자의 성질을 설명하고 있다. 물리학적인 방법으로 생명현상에 접근하라는 보어의 가르침을 잘 실행한 셈이다. 이때는 에이버리가 실험하기 9년 전이라 유전물질의 정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이었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35년의 델브뤼크 논문이 ‘분자생물학’의 시발점이라 할 만하다.

델브뤼크의 논문에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 에어빈 슈뢰딩거도 있었다. 슈뢰딩거는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등의 이른바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에 반발해 ‘슈뢰딩거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을 고안하기도 했는데 그게 1935년의 일이었다. 그런 슈뢰딩거가 1944년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냈다. 이 책 또한 물리학의 관점에서 생명현상을 다루고 있고 델브뤼크의 35년 논문을 인용하며 자기주장의 주요 원천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5장은 델브뤼크의 모형에 관한 논의에만 할애했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유전자를 커다란 단백질 분자라 추정한다. 슈뢰딩거는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를 탐구하면서 얻은 양자역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가령 유전자가 분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양자역학적인 에너지의 단절성에서 찾는다. 즉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에너지 상태와 그 다음 에너지 상태가 불연속적이다. 따라서 한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려면 미세한 에너지가 조금씩 여러 차례 가해져서는 안 되고 두 상태의 에너지 차이에 해당하는 큰 에너지가 한꺼번에 공급돼야만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매끈한 비탈면(고전적인 연속적 에너지 상태)에서는 아주 잔걸음으로도 올라갈 수 있지만 높은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르막(불연속적인 에너지 상태)을 오를 때는 잔걸음이 아니라 계단 턱에 해당하는 높이만큼 보폭을 높여야 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되면 분자의 안정성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요즘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학문간 융합이 이 시대에는 아주 자연스럽고도 광범위하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보어, 슈뢰딩거, 델브뤼크 같은 과학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선구적인 혜안 덕분에 많은 인재들이 생물학에 뛰어들어 분자생물학의 새 시대를 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델브뤼크는 잠시 모건의 파리방(fly room)과 그 분야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보였으나, 역시나 초파리는 ‘분자’생물학을 고민하는 과학자에게는 너무나 거시적인 대상물이었다. 그런 델브뤼크에게 우연히 알게 된 박테리오파지는 축복 같은 존재였다.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단계에 있으면서 구조도 그 이상 단순할 수 없을뿐더러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개체로 증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델브뤼크는 이탈리아 출신의 살바도르 루리아와 허시를 차례로 만나 공동연구를 이어나갔다. 이들은 박테리오파지가 어떻게 세균에 침투해 자가증식하고 유전정보가 어떻게 옮겨지는지를 규명했다. 델브뤼크와 루리아는 세균이 무작위적으로 변이를 일으키며 그 변이가 예컨대 세균을 감염시키는 박테리오파지에 의해서 유도되는 것이 아님을 보였다. 그중에 특정 박테리오파지에 면역을 보이는 세균만 살아남는다. 이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틀렸고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옳음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또한 세균 같은 미생물에도 유전자가 있음이 드러났다.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균 따위에는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허시는 동료인 체이스와 함께 박테리오파지의 구성물에 방사성 원소를 집어넣는 아주 영리한 실험을 진행했다. 박테리오파지의 구성물이라고 해 봐야 핵산인 DNA와 그것을 둘러싼 단백질 껍데기밖에 없다. 이들은 방사성 인(P32)을 DNA에, 방사성 황(S35)을 단백질에 투입했다. 인은 DNA에는 있으나 단백질에 없는 원소이고 황은 그 반대이다. 방사성 원소는 생체 안에서 일종의 추적기 역할을 한다. 허시와 체이스는 이 박테리오파지들을 대장균에 감염시켜 각각의 방사성원소가 어디로 갔는지를 추적했다. 이들은 원심분리기를 써서 파지와 대장균을 분리하고, 대장균 속의 파지 자손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대장균 속에서는 방사성 인으로 표지된 파지만 발견되었고 방사성 황으로 표지된 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방사성 황은 대장균에서 원심분리된 원래의 파지에만 남아 있었다. 이 결과는 박테리오파지가 대장균 속으로 침투해 증식할 때 그 유전정보가 단백질이 아닌 DNA를 통해 전달됨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유전물질의 정체가 DNA임을 확인한 것이다.

델브뤼크와 루리아, 허시는 196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 이유는 바이러스의 복제기제와 유전자 구조를 규명한 공로였다. 허시-체이스 실험이 진행된 뒤 불과 2년 만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분자구조를 규명해 20세기 분자생물학의 새 시대를 열었다.

[출처] 동아사이언스-사이언스N사피엔스 (2020. 12. 24),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 2021.03.2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