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전물질을 발견하기까지 /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1900년 극적으로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되기는 했지만 유전을 담당하는 물질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바가 없었다. 월터 서턴과 테오도르 보페리는 1903년 유전물질이 염색체 위에 존재한다고 추정했다. 염색체는 세포핵 속에 있는 물질로 아닐린 같은 시약에 염색이 잘 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유전자, 유전학이라는 이름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멘델의 이론을 정확하고 쉽게 다시 정리했던 윌리엄 베이트슨은 1906년 유전학(genetics)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고 빌헬름 요한센은 1909년 유전자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유전자는 멘델이 사용했던 유전인자의 20세기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베이트슨은 유전자가 염색체 위에 있다는 염색체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염색체설을 확립한 것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실험동물학자인 토머스 모건이었다. 모건은 1908년부터 초파리를 이용한 실험을 진행했다. 초파리는 일반 가정의 음식물 쓰레기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구하기 쉽다. 덩치도 작으니 대규모 사육을 해도 공간적인 부담이 없다. 또한 알에서 성충까지 자라는 데에 약 10일 정도밖에 안 걸리고 자손도 많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많은 후속 세대의 결과를 볼 수 있다. 염색체의 수가 네 쌍으로 적어 관찰과 분석이 쉽다는 것도 장점이다.
유전학자인 스티브 존스는 “초파리는 거의 과학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디자인된 것만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유전학을 만든 장본인은 초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파리 덕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경우는 무려 6회로 총 10명의 과학자가 그 은혜를 입었다.
초파리가 과학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이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윌리엄 캐슬이 그 주인공이다. 이전까지 토끼나 생쥐가 주요 실험 대상이었던 것에 비하면 역시나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실감난다.
애초에 모건은 멘델의 이론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초파리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초반에는 그리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모건은 붉은 눈을 가진 노랑초파리(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초파리)를 몇 세대가 지나도록 교배를 계속하며 관찰했지만 별다른 특이사항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70세대에 접어들면서 흰 눈을 가진 초파리가 한 마리 태어났다. 이 초파리가 유전학의 역사를 바꾸었다. 몸이 허약했던 그 ‘화이트(white)'를 모건은 금지옥엽으로 키워 다양한 교배실험을 계속했다. 그 결과 모건은 멘델의 법칙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새로운 업데이트도 필요했다. 모건은 초파리 눈의 색깔이 암수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내고, 눈의 색깔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초파리의 X염색체 위에 존재하리라는 대담한 가설을 세웠다. 후속실험으로 모건은 자신의 가설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X염색체 위에 다른 유전자들도 줄지어 있음을 밝혀냈다. 마치 구슬이 실에 꿰여 있듯이 유전자가 염색체에 꿰여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같은 염색체 위의 유전자들은 서로 연관돼서 자손에게 물려질 것이다. 이점은 멘델의 결과와 완전히 같지 않다. 멘델은 몰랐으나, 멘델이 완두콩을 관찰했던 7개의 대립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모두 서로 다른 염색체 위에 놓여 있었다. 그 때문에 멘델은 비교적 간단하고도 쉽게 자신의 결과를 해석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멘델은 운이 좋았다.
한 염색체 위에 여러 유전자가 진주목걸이마냥 주렁주렁 꿰여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메시지를 던진다. 첫째, 정말로 유전자가 염색체 위에 존재한다는 염색체설을 확인한 셈이다. 실제 모건은 이 공로로 193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둘째, 이는 유전자가 세포 속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어떤 물질이며, 따라서 이제는 세포학 내지 어떤 유기물질 또는 화학의 언어로 유전학을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염색체 속의 어떤 물질이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실체인가를 탐구하도록 방향을 제시한 셈이기도 하다. 셋째, 염색체 위에 여러 유전자가 배열돼 있다면, 각 염색체에 어떤 유전자가 어떤 순서로 배열돼 있는가를 규명하는 작업, 즉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 작업을 당연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의 연구 성과가 그 다음의 연구과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모건 연구진의 스터티번트는 1913년 최초로 유전자지도를 작성했다. 그 염색체는 초파리의 X염색체였다. 이렇게 엄청난 성과들을 냈으니, 파리방(fly room)으로 불렸던 모건의 연구실이 유전학의 중심지로 발돋움한 것은 당연했다. 파리방에서 돌연변이를 연구했던 허먼 멀러는 훗날 X선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쉽게 돌연변이를 냈다. 이 공로로 멀러는 1946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렇다면 과연 유전물질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실체를 밝히기까지에는 모건 이후로도 약 4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여정의 중요한 분기점은 1928년의 영국 세균학자 프레더릭 그리피스였다. 그리피스는 폐렴구균에서 형질전환 현상을 발견했다.
형질전환을 간단히 말하자면 ‘수평적인 유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보통의 유전은 부모에서 자손에게 유전자가 전달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만약 유전자가 어떤 화학적인 물질이고 이것이 생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다른 개체에게 전달되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아마 유전물질을 전달받은 개체는 새 유전자의 영향으로 원래 없던 형질을 발현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을 ‘형질전환(transformation)’이라 한다. 사람에게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진 않지만 (SF영화 속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세균 같은 미생물의 세계에서는 훨씬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리피스가 발견한 것이 이것이다.
그리피스가 연구했던 폐렴구균은 역사상 최악의 독감으로 꼽히는 1918년의 스페인 독감과 관련이 있다.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은 전 세계 2천만 명 정도 되는데 이중 많은 사람들이 인플루엔자에 의한 독감이 아니라 폐렴구균에 의한 2차 감염으로 속발성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정부에서는 폐렴의 원인인 세균을 연구해 백신을 개발하도록 했고 그리피스도 영국 보건부의 의료관으로서 폐렴구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피스는 폐렴구균에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아냈다. 하나는 매끄러운(S형) 균주로 세포표면이 다당류로 매끄럽게 코팅돼 숙주 면역세포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거친(R형) 균주로 S형과 같은 코팅이 없어 면역세포가 쉽게 제압할 수 있다. 따라서 쥐에 S형 균을 주입하면 쥐가 폐렴으로 죽지만 R형 균을 주입하면 쥐는 살아남는다. 그리피스는 두 형태의 폐렴구균으로 아주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먼저 S형을 열처리해 죽인 뒤 쥐에 주사했다. 당연하게도 쥐는 폐렴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다. 이번에는 열처리한 S균과 살아 있는 R균을 함께 섞어서 주사했다. 원래 R균은 쥐의 면역세포에 취약하고, 면역세포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S균은 죽었으니 쥐는 무사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결과는 반대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쥐가 죽었으니 쥐의 몸속에는 분명 S균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죽은 쥐를 부검해 봤더니 살아있는 S균이 검출되었다. 이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살아있는 R균이 죽은 S균을 만나 S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R균의 형질이 S균의 형질로 바뀐 것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죽은 S균에서 다당류 캡슐을 만드는 정보가 살아있는 R균으로 전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열처리로 S균이 죽더라도 그 속에서 파괴되지 않은 S균의 어떤 정보전달 물질이 R균에 전해져 R균이 S균처럼 다당류 캡슐로 코팅을 해서 숙주의 면역체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렇게 형질이 전환된 S균을 배양하면 계속해서 쥐를 폐렴에 감염시킬 수 있었다. 이는 R형에서 S형으로 형질이 전환되면 그렇게 전환된 형질이 후대에 유전됨을 암시한다.
S균의 형질이 R균으로 전이되었다면 이는 S균의 다당류 껍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R균으로 옮겨졌다고 볼 수 있다. 한 개체의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생식과정을 통해 자손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에도 옮겨질 수 있다면 유전자는 생식과정에 등장하는 어떤 신비적인 요소가 아니라 평범한 화학물질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리피스는 1941년 독일의 런던 대공습 때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리피스가 폐렴구균의 형질전환을 발견했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 텍사스 대학의 멀러는 X선으로 돌연변이 초파리를 ‘양산’하고 있었다. (그리피스가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 1928년 1월이었고 멀러가 돌연변이 논문을 발표한 것이 1927년이었다.) X선이란 그저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일 뿐이다. 가장 대표적인 전자기파는 가시광선, 즉 빛이다. 따라서 X선은 빛과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X선의 파장은 자외선보다도 더 짧다. 양자역학의 시대를 열었던 막스 플랑크의 광양자 가설에 따르면 빛은 파장이 짧을수록 그에 반비례해 에너지가 커진다. 양자역학적으로 빛은 이처럼 파장에 반비례하는 에너지를 가진 알갱이, 즉 광자(photon)일 뿐이다. 1920년대에는 양자역학이 혁명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로서 빛이나 전자의 입자-파동 이중성 같은 성질들을 확인하고 양자역학의 이론적인 체계들을 정립하던 때였다.
유전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파장이 짧은 빛 알갱이를 쪼였을 때 예기치 못한 변화가 생겼다면 유전자란 결국 빛 알갱이와 어떤 상호작용을 해서 상태가 바뀌는, 그다지 신비롭지 못한 물질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멀러가 X선으로 수많은 돌연변이를 쉽게 양산했다는 결과는 유전자의 실체가 전자기파와 상호작용하는 어떤 화학물질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전물질의 정체에 다가가는 결정적인 한 발을 내디딘 사람은 미국의 오즈월드 에이버리였다.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더욱 정교하게 재현해 폐렴구균의 형질전환 물질의 정체에 관한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다. 그 정체는 ‘멍청한 분자(stupid molecule)’ 라 불렸던, 에이버리 스스로는 “분자들 중의 약자(underdog)” 라 불렀던 디옥시리보핵산, 즉 DNA였다.
[출처] 동아사이언스-사이언스N샤피엔스(2020.12.10) /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교수
※ 필자 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 2021.03.25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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