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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DNA의 이중나선 구조' 이종필 건국대 교수 (2021.03.25)

푸레택 2021. 3. 25. 18:01


■ DNA의 이중나선 구조 /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그리피스와 에이버리, 그리고 허시-체이스의 실험을 통해 유전물질의 실체가 DNA라는 핵산임이 거의 확실해졌다. 정체가 밝혀졌으니 이제 그 대상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를 얻는 게 순서이다. 지적 호기심에 목마른 과학자들은 욕심이 많아서 하나를 알고 나면 그 다음 순서를 더 알고 싶어한다. 어쨌든 DNA는 세포핵 속에 있는 화학물질이고 따라서 어떤 구체적인 분자구조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 구조를 알아내려 했다.

DNA 같은 고분자 화합물의 구조를 알아내는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그 구조를 ‘보는’ 것이다. 맨눈이나 현미경으로 간단히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인간의 눈이나 광학현미경의 성능이 그렇게까지 뛰어나지는 못하다. 그러나 ‘본다’는 의미에 충실하면 좋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결국 그 대상에서 튕겨 나오는 빛 알갱이인 광자를 감지하는 것이다. 보는 행위의 본질은 충돌이다. 또한 빛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니까 빛, 즉 가시광선 이외의 전자기파를 원하는 대상에 충돌시켜 튕겨 나오는 신호를 분석하는 것도 훌륭한 관측행위이다. 마침 과학자들에게는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 목적에 맞는 전자기파를 하나 갖고 있었다. 바로 엑스선이다.

엑스선은 그 파장이 자외선보다는 짧고 감마선보다는 긴 전자기파이다. 엑스선의 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엑스선이 뭔가를 ‘보는’ 데에 엄청난 이점이 있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의사들이 엑스선을 이용해 인체 속을 들여다본다면 물리학자들은 엑스선을 이용해 물질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독일의 막스 폰 라우에가 결정체에서 엑스선이 회절하는 현상을 관찰한 이래 영국의 윌리엄 헨리 브래그와 그의 아들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는 엑스선을 이용해 결정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음을 보였다. 결정에 의한 엑스선의 회절은 결정을 구성하는 격자들에 엑스선이 튕겨 나올 때 각 엑스선들이 지나온 경로의 차이 때문에 최종적으로 간섭을 일으켜 생기는 현상이다.

이는 고전적인 빛의 두 틈 실험과 기본적으로 같은 원리로서 격자들 사이의 간격이 엑스선이라는 전자기파의 파장과 비슷할 때에 잘 생긴다. 로렌스 브래그는 엑스선의 경로차에 따른 간섭조건을 이용해 이웃한 격자에서 반사된 엑스선이 서로 소멸되지 않고 보강되는 조건을 발견했다. 이를 브래그의 법칙(Bragg's Law)이라 부른다. 이 공로로 아버지와 아들은 191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위원회에서 밝힌 공식적인 수상이유는 “엑스선을 이용해 결정구조를 분석한 공로(for their servics in the analysis of crystal structure by means of X-rays.)”였다.

이로써 엑스선 결정학의 새 시대가 열렸다. 그때 아들의 나이는 25세였다. 이 나이는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가장 어린 나이이다. 또한 부모와 자식이 노벨상을 받은 경우는 더러 있으나(마리 퀴리와 이렌 졸리오-퀴리, J.J. 톰슨과 G.P. 톰슨 등) 같은 해에 공동수상한 경우는 브래그 부자가 유일하다.

의사들은 인체에, 물리학자들은 소금(NaCl)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결정체에 엑스선을 쏘아 재미를 봤다면 생물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엑스선을 이용해 단백질 같은 큰 분자의 구조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영국의 윌리엄 애스트버리가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대까지 엑스선 회절을 이용한 최고의 단백질 사진은 애스트버리의 손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를 이용해 분자구조를 규명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여기서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이다. 폴링은 양자역학의 원리를 적용해 화학결합의 비밀을 규명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학자라 할 수 있다. 폴링은 1951년 로버트 코리 등과 함께 단백질의 알파나선구조와 베타병풍구조를 밝혀냈다. 단백질은 수많은 아미노산이 펩티드 결합으로 연결된 사슬(폴리펩티드)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슬의 구조가 나선형 또는 병풍형임을 제시한 것이다.

단백질의 대표적인 구조가 용수철처럼 꼬여 있는 나선형이라면 다른 중요한 생물학적 분자도 나선형이 아닐까 라고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유전물질의 실체로 지목된 DNA의 구조는 당연히 과학자들의 ‘힙한’ 아이템이었다. 실제로 폴링은 코리와 함께 1953년 1월 DNA가 삼중 나선구조임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폴링은 논문의 사본 한 편을 당시 캐번디시 연구소장으로 있던 브래그에게, 또 한 편은 케임브리지에 있던 자신의 아들 피터 폴링에게 보냈다. 그러나 폴링이 제안한 구조는 화학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구조였다. 그때 영국에서 폴링의 논문을 보고 “당시 누구나 인정하던 세계 정상급 화학자였던 폴링이 어떻게 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결론에 도달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라며 안도했던 사람이 DNA구조 사냥에 나섰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왓슨은 미국 시카고 출생으로 16세에 시카고대에 입학했고 22세에 인디애나대에서 세균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만큼 수재였다. 그의 지도교수는 살바도르 루리아로 델브뤼크와 함께 박테리오파지를 연구해 1969년 노벨상까지 받았다. 야심 많은 젊은 과학도였던 왓슨은 DNA의 구조를 규명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유럽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때가 폴링이 알파나선구조를 밝혀낸 1951년이었다.

거기서 왓슨이 만난 운명의 동료가 프랜시스 크릭으로, 왓슨보다 12살 연상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왓슨은 1928년생, 크릭은 1916년생이니까 1951년이면 왓슨이 23세였고 크릭이 35세 되던 해였다. 원래 물리학을 전공했던 크릭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리고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큰 영감을 얻어 늦은 나이에 생물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크릭이 학위논문을 위해 연구하던 주제는 엑스선을 이용한 단백질 연구였다. 왓슨을 만난 뒤에는 말하자면 과외연구로 DNA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서는 캐번디시가 DNA 연구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영국 과학계에서는 일종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DNA 연구는 킹스 칼리지가 주도하는 모양새였다. 특히 킹스 칼리지에 새로 설립한 생물물리학부에서는 엑스선을 이용해 DNA 회절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핵심 인물은 뉴질랜드 출신의 모리스 윌킨스였다. 폴링이 알파나선구조를 규명하고 왓슨이 케임브리지로 입성했던 1951년, 한 명의 엑스선 회절사진 전문가가 윌킨스의 연구진에 합류했다. 그의 이름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으로, 왓슨은 “그녀는 옷이나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검은 생머리에 어울릴 법한 립스틱도 바르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윌킨스와 프랭클린은 사이가 나빠졌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이 자신의 조수역할을 해 주길 바랐으나 프랭클린은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려고 했다. 반면 왓슨과 크릭은 윌킨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왓슨은 케임브리지로 오기 전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윌킨스의 DNA 구조에 관한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윌킨스가 보여 준 DNA 회절사진에 마음을 빼앗겼다. 말하자면 “왓슨은 사진 한 장에 혹해서 케임브리지로 옮겼다.”

분자에 대한 엑스선 회절사진은 말하자면 관측 자료에 해당한다. 반면 가능한 분자구조의 모형을 세우고 어떤 원리에 따라 계산을 하는 등의 작업은 이론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폴링은 알파나선구조를 알아낼 때 후자에서 탁월한 통찰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모형이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실제 모습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맞춰봐야 한다. 그것이 과학이다. 따라서 엑스선 회절사진이 결정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DNA는 염기, 당, 인산의 세 요소가 결합된 뉴클레오티드가 기본 구성단위이다. 당은 탄소가 5개인 5탄당 리보오스에서 산소가 하나 없는 구조이다. DNA의 D는 DeoxyRibose의 머리글자로서 “Deoxy”는 산소가 없다는 뜻이다. 한편 염기에는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신(C)의 네 가지가 알려져 있었다. 단백질의 알파나선구조가 밝혀진 뒤엔 DNA도 나선구조일 것이라 쉽게 기대할 수 있다. 왓슨과 크릭도 초반에는 당과 인산이 뼈대를 이루고 염기가 뼈대의 바깥쪽을 향하는 3중 나선구조의 모형을 만들었다. 마치 레고 블록을 조립하든 금속으로 만든 원자조각들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작업이었다.

윌킨스와 프랭클린도 이 모형을 보았으나 특히 프랭클린은 이 모형이 자신의 회절사진 결과와 맞지 않음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결국 삼중나선모형은 실패했고 브래그 소장은 왓슨과 크릭에게 DNA 연구를 그만두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런 실패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폴링이 1953년 삼중나선구조를 제안했을 때 그 모형의 문제점을 왓슨과 크릭은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폴링의 모형 또한 염기가 뼈대의 바깥을 향하는 구조였다.

그해 1월말에 왓슨은 폴링의 모형에 대해 윌킨스와 논의하려고 킹스 칼리지를 방문했다. 윌킨스는 이날 왓슨에게 프랭클린의 연구진이 1952년 5월에 찍은 최신의 엑스선 사진을 한 장(51번 사진) 보여주었다. 이 사진을 본 왓슨은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임을 직감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간 왓슨은 크릭과 함께 이중나선을 기본골격으로 하는 DNA 분자구조를 만들기로 작심했다. 그러나 이중나선이라고 해도 당-인산의 뼈대를 안쪽에 두고 염기가 바깥으로 뻗어있는 식으로는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극적인 돌파구는 이 발상을 뒤집는 데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당-인산의 뼈대를 바깥에 두고 염기들이 안쪽을 향하는 구조를 시도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지는 않았다. 염기가 바깥을 향할 때에는 자유도가 많았지만 안쪽을 향하면 네 개의 염기들이 어떻게 얽히고설켜 두 개의 뒤틀린 뼈대를 붙들어두는가 하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뼈대가 중심에 있는 모형에서는 각 가닥의 인산기를 마그네슘이나 나트륨의 2가 양이온이 붙들고 있는 형태가 가능했다. 결국에는 특정한 염기들끼리 퍼즐이 맞춰지듯 수소결합을 통해 짝을 이루면서 두 개의 뼈대가 하나의 이중나선구조를 이루는 결과를 얻었다. 왓슨은 “이토록 아름다운 구조가 진실이 아닐 리 없다”고 여겼다.

왓슨과 크릭은 서둘러 논문을 작성해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투고했다. 1월말에 “51번 사진”을 보고 3월 첫 주에 모형을 완성한 뒤 그달 말에 논문 초안이 나왔다. 1953년 4월25일자 네이처에 실린 이들의 논문은 겨우 842개 단어로 작성되었고 전체적으로 한쪽이 될까 말까한 분량이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중나선구조의 일러스트 한 컷도 들어가 있다. 이로부터 20세기 분자생물학의 새 장이 열렸다.

[출처] 동아사이언스-사이언스N사피엔스 (2021.01.07),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 2021.03.2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