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일기] 뒤돌아본 지나온 길

[추억일기] 박동규의 '그날 밤 눈사람'을 읽고 (2021.02.10)

푸레택 2021. 2. 10. 10:11

 

 

■ 박동규의 '그날 밤 눈사람'을 읽고

당숙(堂叔) 아재가 박동규 교수의 '그날 밤 눈사람'이라는 수필 한 편을 보내왔다. 예전에 읽었던 글인데 다시 읽어도 감동이 밀려온다. 눈이 무릎까지 쌓이고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한밤중, 시인의 아내가 남편 시 쓰는데 방해될까 봐 어린 딸을 둘러업고 집 밖으로 나가 눈사람이 되었다는 글이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어머니가 어찌 시인의 아내뿐이랴. 그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했으리.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다 잊고 지냈는데 오늘 카톡으로 받은 한 편의 수필이 잠자고 있던 기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까마득하게 먼 옛날, 대학교 1학년 교양과정부 '교양국어'를 수필 '그날 밤 눈사람'을 쓴 박동규 교수님한테서 배웠다. 박동규 교수는 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의 아들이다. 세월이 이삼십 년 쯤 흘러간 어느 날, TV 프로그램에 나온 박 교수님을 보았다. 선한 인상에 정감 어린 말투, 옛 학창 시절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것 또한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시인 박목월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이다. 대표 시로는 '나그네', '윤사월', '청노루' 등이 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이 시 '나그네'는 누구나 학창 시절 애송하는 대한민국 대표시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청노루)

박목월은 소설가 황순원(黃順元)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아들과 딸을 낳으면 사돈을 맺자고까지 약속했는데 두 분 모두 첫 아이가 아들이었다. 그래서 사돈은 훗날의 얘기고 아들 이름을 똑같이 하자고 하여 '동규(東奎)'라고 지었다고 한다. 박동규와 황동규. 소설가 황순원은 '소나기', '독 짓는 늙은이', '목넘이마을의 개',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박목월의 아들 박동규는 서울대 국문과에,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는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두 분 모두 서울대 교수가 된다. 박동규는 문학평론가, 황동규는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재미난 것은 박목월과 황순원이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고 하는데 이름까지 같게 지은 그 두 분의 아들, 박동규와 황동규는 성격이 달라서인지 활동 분야가 달라서인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시인 박목월의 아들 박동규 교수는 추억 속 아버지를 회고한 어느 글에서 '아버지는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하셨다'고 썼다. 식사 자리에 가족이 둘러앉으면 언제나 “다 왔니?” 하며 다섯 아이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은 뒤에야 수저를 들었다고 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도 어른들이 아이들을 칭찬하는 최고의 방법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사랑은 체온으로 전달된다고 하지 않던가?

박동규 교수의 '그날 밤 눈사람'을 읽으니 사랑과 헌신으로 사셨던 나의 어머니가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고등학교 시절, "참고서 살 돈 좀 주세요" 하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 어머니는 그 모진 세월 가난 속에서도 아껴 두신, 꾸깃꾸깃 접은 돈을 주머니에서 꺼내주셨다. 박동규 교수의 어머니만큼 남편과 자식 위해 한 평생 헌신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목이 메어온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는데, 그 행복을 미처 다 누리지 못하시고 일찍 하늘 나라로 돌아가신 어머니. 천주교 혜화동 성당을 다니시며 영세를 받으시고 천국 올라가셨으니, 그 영혼 고통도 눈물도 없는 그곳에서 평안하시리라.

어머니,
어머니 음성을
저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택아!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어머니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박목월의 시「下棺」을 인용하여)

/ 2021 02.10 김영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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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눈사람 / 박동규

내가 6살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는데, 아버지는 글을 쓰고 싶으셨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방에 상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책상이 없었던 아버지는 밥상을 책상으로 쓰고 있었죠. 어머니는 행주로 밥상을 잘 닦아서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책상에 원고지를 올려놓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세 달 된 여동생을 등에 업히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불 같은 포대기를 덮고서는 "옆집에 가서 놀다 올 게!" 하고 나가셨습니다.

나는 글 쓰는 아버지의 등 뒤에 붙어 있다가 잠이 들었고 얼마를 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나를 깨워서 눈을 떠 보니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깨우더니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어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나가서 어머니를 좀 찾아오너라."

나는 자던 눈을 손으로 비비고 털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가 보니까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었고 또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집 저 집 어머니를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지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오려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와 제일 친한 아주머니가 아랫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번만 더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전봇대가 있고 그 전봇대 옆에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눈사람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동규야!" 하고 불렀습니다.

보니까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눈을 철철 맞으며 보자기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 보자기를 들추면서 가까이에 오시더니 "너 어디 가니?"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볼멘소리로 어머니를 찾아오라고 해서 아랫동네 아줌마 집에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가 내 귀에 가까이 입을 대면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글 다 쓰셨니?"
나는 고개만 까딱거렸습니다. 어머니는 내 등을 밀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 일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삽니다. 세월이 갈수록 내 머릿속엔 몇 시간씩이나 눈 구덩이에 서서 눈을 맞으며 세 달 된 딸을 업고 있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세 달 된 내 여동생이 아버지가 시를 쓸 때 울어서 방해될까 봐 그렇게 어머니는 나와서 눈을 맞고 서 있었던 겁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처음 직장에 다닐 때 즈음 조금 철이 들어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한 번 물었습니다.

"엄마, 그때 얼마나 힘들었어? 돈도 많이 벌어오지도 못하고, 그런데 어머니는 뭐가 좋아서 밖에 나가서 일도 하고, 힘들게 고생하면서 애를 업고 있었어?"

나는 어머니가 우리 집 생활을 끌고 가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웃으면서,

"그래도 니 아버지는 밤에 그렇게 시를 다 쓰고 나면 발표하기 전에 제일 먼저 나보고 읽어보라고 해." 하고 웃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겪어가면서도 시인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시 한 편을 읽어보라.'고 하는 아버지의 배려의 힘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고 사는 것은 이런 배려를 통해서 서로 사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ㅡ 박동규 문학박사가 기억하는 내 어머니
(청록파 시인 박목월 님의 아내 이야기)

/ '받은 글' 옮김


■ 밥상 앞에서 / 박목월

나는 우리 신규가
젤 이뻐
아암 문규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아빠, 참말이지
접 때처럼 안 까먹지
아암, 참말이지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온다는데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바람이 설레는 빈 공간

어린 것을 내가 키우나
하나님께서 키워 주시지
가난한 자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뜻을
내야 알지만
상 위에 찬은 순식물성
숟갈은 한죽에 다 차는데
많이 먹는 애가 젤 예뻐
언제부터 측은한 정으로
인간은 얽매어 살아왔던가
이만큼 낼은 선물 사올 게
이만큼 벌린 팔을 들고
신이여, 당신 앞에
육신을 벗는 날,
내가 서리다

ㅡ 박목월 시인, 유고 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 中에서

/ 2021.02.10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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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수필] '어머니',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 박동규 (2021.02.10)

■ 어머니 / 박동규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6.25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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