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일기] 뒤돌아본 지나온 길

[노래인생] 군대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노래 '처녀 뱃사공' (2021.09.29)

푸레택 2021. 9. 29. 18:14

△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 (농민신문)

‘처녀 뱃사공’에 숨겨진 애달픈 사연

오늘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국민 애창곡 「처녀 뱃사공」 노래 속에 애틋한 사연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래 가사 속 주인공 누이동생은 전쟁터에 나간 오라버니가 언제 오실까 기다리며 뱃사공이었던 오라버니가 젓던 노를 저으며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노랫말 속 군인 오라버니와 큰애기 사공이 실제 인물이라고 한다. 노래 속 누이동생이 기다리던 군대 간 오라버니는 6·25전쟁 때 군에 입대한 호국용사인데 안타깝게도 전쟁통에 전사했다고 한다.


「처녀 뱃사공」은 1958년에 발표된 음악으로 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으로 노래는 황정자 씨가 불렀다. 노랫말을 쓴 윤부길은 성악가, 작사가였으며 뮤지컬 배우와 극작가, 희극인으로 전국유랑극단을 만들어 「부길부길쇼」를 이끌며 전국을 돌았다고 한다.

윤부길은 경남 함안에서 공연을 마치고 이동하던 중 나룻배에서 노를 젓고 있는 뱃사공이 이십대 젊은 처녀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사연을 듣게 된다. 오빠가 군에 입대했고 두 여동생이 번갈아가며 오빠가 하던 힘든 뱃사공 일을 계속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애틋한 사연을 들었고, 이 사연을 가슴에 오래 담아두고 있다가 가사를 썼다고 한다.

농민신문기사와 이동순 칼럼 글을 인용하여 국민 애창곡 「처녀 뱃사공」 노래에 얽힌 사연들을 적어본다.

△ 처녀 뱃사공 노래비 (경남 함안)

◇ 윤부길 전국 방방곡곡을 바람처럼 떠돌다

윤부길은 경성음악전문학교(서울대 음대) 1회 졸업생으로 성악과 작곡을 전공한 일본 유학파였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인형을 이용한 복화술 코미디언이다. 부인은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인 고전무용가 성경자이고, 가수 윤항기와 윤복희는 이들 부부의 자녀들이다.


윤부길은 재치와 유머감각이 뛰어난 원맨쇼의 개척자로서 풍자적 개그쇼의 솜씨론 그를 따라올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독보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워낙 전쟁 끝의 험한 시절이라 극장공연만으로는 생계를 잇기 힘들어 악극단을 꾸려서 전국 방방곡곡을 바람처럼 떠돌며 그날그날의 삶을 연명해 갔다.

이런 고난 속에서 윤부길은 고질적 병력과 영양실조를 이겨내지 못하고 여러 해 파란과 굴곡을 겪다가 4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홀로 남은 아내마저도 악극단을 따라 떠돌다가 병을 얻어 동해안 묵호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다. 낯선 강원도 묵호의 산언덕 황토구덩이에 윤복희 어머니가 묻히던 날, 악극단 동료단원들은 북과 나팔, 애달픈 바이올린 선율로 슬픈 장송곡(葬送曲)을 연주하며 마지막 길을 떠나보냈다고 한다.

◇ 노래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한을 달래주다

「처녀 뱃사공」 노래를 부른 가수는 황정자다. 서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이동 순회극단의 막간가수로 무대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깜찍하고 또랑또랑한 발음과 박력과 애교가 느껴지는 창법으로 대중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일찍부터 천재소녀가수란 평을 얻었다. 황정자의 여러 노래들은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들의 깊은 한과 서러움을 부드럽게 달래고 어루만져 주었다.


최고의 신(新)민요가수로 명성을 날리던 황정자에게 시련과 불행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가족들과의 생이별이었다. 건강이 불안정하게 되면서 남편과 이혼하고 사랑하는 두 아들마저 남편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러한 충격으로 황정자는 정신적 타격을 받으면서 기억상실증에 정신이상증세까지 겹쳐 경기도 의정부의 어느 극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 후 황정자의 존재는 대중들의 기억에서 급격히 잊혀졌고 극도의 고립과 단절 속에서 그녀의 병은 점점 심해져 마침내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홀연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무연고자와 같은 신세로 장지(葬地)를 향해 영구차가 떠나는 시간에도 뒤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인기 가수로서가 이니고 한 인간으로서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출처 농민일보, 이동순 칼럼 글 인용함)

어느 노래인들 사연이 없을 수 없겠지만 「처녀 뱃사공」 노래에 노랫말 속 주인공과 작사가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른 가수까지 이런 애달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처녀 뱃사공」 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니 젊은 청춘의 시절 강원도 양구에서 군복무할 때의 추억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 용늪마을 대암산 입구에서 (2021.06.06)
△ 용늪길 대암산 입구에서 (2021.06.06)
△ 양구 후곡약수터 앞 대암산생태탐방로 안내도(2017.5.12)

■ 「처녀 뱃사공」에 얽힌 군대 추억

1970년대 중후반, 나는 강원도 양구 땅에서 군복무를 하며 3년 세월을 보냈다. 내가 군복무한 부대는 대암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독립대대였다. 동면 원당리 21사단 66연대를 지나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부대정문이 나타난다. 부대 주변에 민가라고는 한두 집 술을 파는 주막과 가게 밖에 없었다.

대암산은 높이 1,312m로 정상에는 1997년 대한민국 1호 람사르 협약 습지로 등록된 용늪이 있다.(1973년 천연기념물 지정) 용늪은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용늪은 이탄습지(泥炭濕地)로 하늘아래 맞닿아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 고층습원(高層濕原)이며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지형으로 생태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 △ 용늪길 대암산 입구에서 (2021.06.06)

◇ 용늪생태탐사 때 대암산 정상에 오르다

봄이면 대암산은 온 산 가득 울긋불긋 진달래 꽃이 피어났고, 가을엔 온 산이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 병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우리 8인치 곡사포 부대가 포대 전술훈련을 할 때면 대암산을 향해 포탄을 쏘았다. 가끔씩 대암산 기슭으로 교육 훈련을 받으러 올라간 적은 있지만 군복무할 때 대암산 정상까지 올라가 본 적은 없었다. 전역 후 20년이 지나 용늪생태탐사에 참가하여 난생 처음 대암산 정상에 올랐다. 안개 속에 감추어진 환상적인 용늪을 처음 보며 느꼈던, 꿈을 꾸는 듯한 그 감격스럽던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용늪마을 대암산 입구에서 (2021.06.06)

◇ 양구 땅에서 세 번의 겨울을 보내다

내가 군입대하던 해에 군복무 기간은 36개월이었다. 그후 내가 상병 계급장을 단 후에 33개월로 단축되었다. 따라서 군입대일에 따라 병사들의 군복무 기간이 달랐다. 또한 대학 교련 2년을 이수한 경우 군복무기간이 3개월 단축되었다. 어쨌든 나는 그 젊디 젊은 청춘의 시간, 30개월 열흘을 국가에 바쳤다. 18개월 군복무하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군대생활 33개월은 정말 길고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가겠네. 그래도 양구보다는 나으리. 내가 군복무를 할 때 많은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던 말이다. 겨울이 오면 몸도 마음도 다 얼어붙는 그 양구 땅에서 춥고 서럽고 길고 긴 날을 보냈다. 모든 것이 열악했던 시절이라 새삼 그때 일들을 무어라 말하기도 계면쩍다. 오지의 땅이라 불리던 그 멀고도 멀었던 양구가 지금은 터널도 뚫리고 도로가 좋아져 이웃처럼 느껴진다.

△ 양구 후곡약수터 대암산생태탐방로 안내도(2017.5.12)

◇ 내무반 침상에 모여 앉아 부른 노래들

예나 지금이나 군대생활의 어려움은 부대마다 다르고 또 맡은 보직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나는 군수행정병이었는데 일과 후에도 쌓인 업무를 처리하고 보초를 두 시간 서다 보니 늘 잠이 부족했다. 주로 사무실에서 근무하니 다른 전우들에 비해 편한 직책이기는 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참으로 서럽고 힘들었던 나날이었다. 그래도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은 있다. 그런 추억 중 하나는 힘든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친 부대원들이 내무반 침상에 모여 앉아 즐겁게 노래를 불렀던 장기자랑 시간의 추억이다. 군가가 아닌 가요를 마음껏 부르며 전우애를 다졌던 그때 기억이 떠오를 때면 내 입가엔 미소가 감돈다.

그때 누군가는 「삼팔선의 봄」을 불렀고 누군가는 「전선야곡」을 불렀다. 또 누군가는 「꿈꾸는 백마강」을 불렀고 어느 전우는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불렀다. 내 차례가 왔다. 내가 부른 노래는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였다. 하도 오랜만에 부르다 보니 가사를 잊어버려 끝까지 부르지도 못하고 박수만 받았다.

△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많은 기억들이 사라졌지만 노래자랑 시간의 기억만큼은 또렷이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문득 문득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그때 가사를 잊어 미처 못다 부른 그 노래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다시 불러보곤 한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든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은 풀려
애닲은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에 종이 울린다
아아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그 서럽던 시간은 흐르고 흘러 동토의 계절이 지나고 양구에도 봄기운이 찾아오던 날, 나는 꿈에도 그리던 얼룩무늬 제대복을 입었다. 겨우내 내린 눈이 미처 다 녹지 못한 채 잔설로 남아있는 대암산을 뒤로 하고 부대를 떠나올 때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음 속에 흘러내렸다.

△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 (농민신문)

◇ 양구 선착장 가는 길에 부른 노래

부대정문을 뒤로 하고 원당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양구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배를 타기 위해 소양강 양구선착장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 전역 동기 셋은 목놓아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전선야곡」을 불렀고 「삼팔선의 봄」을 불렀다. 황정자의 노래 「처녀 뱃사공」을 부를 땐 군인 오빠를 기다리는 동생들 생각에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 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에 수줍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 전문

△ 부대개방행사에 참가하여 옛 8인치곡사포와 부대 랜드마크 조형물 앞에서 (2017.5.12)
△ (추록) 친구가 단톡에 올린 '양구 선착장' 풍경 사진 (2021.10.03)

젊은 날의 추억들은 한갓 헛된 꿈인가

우리 전역 동기 셋은 양구 소양강 선착장 가는 길을 걸어가며 이 노래를 목놓아 불렀었다. 그러고는 우리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다짐도 했다. 그리고 야속한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갔다. 그 젊디 젊었던 청춘들은 이순(耳順)도 지나고 고희(古稀)를 향하고 있다.

젊은 시절이 그리울 때면 전역하던 날 양구 선착장 가던 길을 그리며 그때 전역동기 셋이 함께 불렀던 노래, 「전선야곡」과 「삼팔선의 봄」 그리고 「처녀 뱃사공」을 불러본다. 그때 함께 노래를 불렀던 전우들은 소식 한 장 전할 길이 없다. 노래는 여전히 변함이 없건만 나의 젊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젊은 날의 추억들은 한갓 헛된 꿈이련가.

△ 폭설이 내리는 날 사무실 앞에서 (1978)

◇ 가슴뭉클한 댓글 사연에 공감하다

몇 년 전, 청춘 시절 양구에서 군복무할 때 찍은 사진을 모아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조회수가 무려 43만 뷰를 넘었고 댓글이 수백 개 달렸다. 그 시절 전우들뿐만 아니라 60년대 선배들과 80~90년대 군복무한 전우들 그리고 최근에 전역한 젊은 청년들도 찾아왔다. 심지어 현재 군복무 중인 현역병, 자녀를 군대에 보낸 부모들도 글을 남겼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한 개인의 군대시절 평범한 일상을 찍은 사진, 그것도 40년 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8인치 견인곡사포 시절의 군대 생활 사진 모음일 뿐인데 수
많은 전우들이 찾아온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젊음을 바친 군대시절을 추억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군대를 떠난 후엔 그곳을 뒤도 돌아보기 싫고 그 시절의 일들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영상에 달린 짤막한 댓글 속에는 그때 그 시절 전우들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녹아있고, 눈물로 읽어야 할 갖가지 애틋한 사연들이 담겨져 있다. 부대 내에 구타가 있었지만 그래도 선임과 후임들의 끈끈한 정이 많던 시절이었다며 제대할 때 347고지 위에서부터 멀리까지 눈물을 글썽이면서 산길을 따라 내려와 작별 인사를 해 준 후임 전우들이 생각난다는 글도 있고, 멀리 이국 땅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젊은 시절 군대 동기를 찾고 싶다는 글도 있다. 양구와 인제에서 군복무한 전우들은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서 제설 작업할 때의 고생담을 댓글에 담았다.

△ 전역하던 날 대암산 부대를 떠나며 전우들과 함께 (1978)
△ 전역하던 날 대암산 부대를 떠나며.. 군수과 과장님, 선임하사님, 인사과장님(본부포대장님), 군수과원들과 함께 (1978)

◇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리다

집에 있는 전화기 한 대가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던 시절은 가고, 개인마다 손전화에 SNS에 유튜브와 포탈로 온갖 정보를 주고받는 시절이 왔다. 빅데이터로 나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집단이 있고, 알고리즘으로 내게 알맞는 정보를 주는 집단도 있다. 앞으로 10년 내에 또 다른 어떤 세상이 도래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이렇듯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해도 사람들 마음 한 구석에는 옛적 아날로그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DNA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낀다.

회자정리(會者定離)요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고 했던가. 청춘의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 언젠가는 꿈을 꾸듯 만나 「전선야곡」, 「꿈꾸는 백마강」, 「처녀 뱃사공」 노래를 함께 불러볼 그날을 기다려 본다.

△ (추록) 친구가 단톡에 올린 '양구 선착장' 풍경 사진 (2021.10.03)

/ 2021.09.29(수) 깊어가는 가을에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을 글로 남겨본다.


https://youtu.be/L1Mq2SBaZZk

https://youtu.be/fzQhM7NHbyA

https://youtu.be/G4XaI76rFb8

https://youtu.be/tX2U2b2Yk2Y

https://youtu.be/Hh702f6vWY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