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랑잎 한 잎 / 김종길
나의 아침 산책은 대개
수유리 01번 마을버스 종점 맞은 편,
커피자판기 옆에 놓은 벤치에서 끝난다
봄철에서 가을철까지는 그 주변에
담배꽁초며 빈 담뱃값, 종이컵, 맥주캔 등이 나뒹굴고 있어
그 전날 밤 그 벤치에서 젊은 애인들이나 실직한 젊은이들이
밤늦도록 노닥거리거나 한숨지으며 연실 담배만 피운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 새벽엔 기온이 영하 4, 5도로 떨어져
그 벤치엔 먼저 온 사람도 없고,
간밤에는 젊은이들도 오지 않은 듯
그 주변도 말끔히 정돈된 대로다.
그러나 벤치는 오늘 아침 비어 있지 않다.
거기엔 언제 떨어졌는지 가랑잎이 한 잎
나보다 먼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 옆에 말없이 걸터 앉는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한 잎 가랑잎,
머잖아 흙으로 돌아가 필경에 흙이 될 것을
오늘 아침엔 길가의 추운 벤치 위에서 잠시
한 잎 가랑잎과 자리를 함께 해 보는고나
[감상과 해설]
흔히 시의 언어는 압축과 생략을 통한 운문으로 운율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아예 산문시란 갈래도 있고, 현대시의 경우 외재율보다는 내재율이 강조된다. 따라서 시가 반드시 일정한 운율에 맞춘, 압축과 생략을 통한 정제된 언어로만 이루지지는 않는다. 김종길의 시 '가랑잎 한 잎'이 그런 경우이다.
사실 이 시에는 해설이 사족일 듯 싶다. 왜냐하면 한글을 독해할 수 있는 독자라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속에는 한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바로 시 속 화자의 산책길이다. 화자의 ‘아침 산책은 대개 / 수유리 01번 마을버스 종점 맞은 편, / 커피자판기 옆에 놓은 벤치에서 끝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벤치 주변에는 ‘담배꽁초며 빈 담뱃값, 종이컵, 맥주캔 등이 나뒹굴고 있어 / 그 전날 밤 그 벤치에서 젊은 애인들이나 실직한 젊은이들이 / 밤늦도록 노닥거리거나 한숨지으며 연실 담배만 피운 것을 알 수 있’단다. 하긴 한적한 곳에 있는 벤치라면, 게다가 어두운 밤이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연애중이거나 실직한 젊은이들이 그런 곳을 찾아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며 쉬었을 터이니 종이컵이나 맥주캔과 같은 쓰레기들이 널부러져 있을 터이다.
그런데 마침 ‘오늘 새벽엔 기온이 영하 4,5도로 떨어’졌단다. 그러니 ‘그 벤치엔 먼저 온 사람도 없고, / 간밤에는 젊은이들도 오지 않은 듯 / 그 주변도 말끔히 정돈된 대로’일 것이다. 그런데 날이 차가와 사람들이 머물지 않았을 터이니 흔히 주변에 널렸던 쓰레기들은 없지만 ‘벤치는 오늘 아침 비어 있지 않다’고 한다. 무엇이 있었을까. 바로 ‘거기엔 언제 떨어졌는지 가랑잎이 한 잎’이 있었다. 이를 화자는 ‘나보다 먼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자. 화자보다 먼저 와 벤치에 앉아 있는 ‘가랑잎 한 잎’ - 정말로 먼저 왔겠는가. 벤치 주변 나무에서 떨어진 잎이 분명하지만 화자에게는 자신보다 먼저 와 벤치에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나도 그 옆에 말없이 걸터앉’았다고 한다. 벤치에 떨어진 낙엽 옆에 나란히 앉아 생각한다. 어찌 보면 자신도 ‘한 잎 가랑잎’이란 생각이다. 그것도 화자의 나이가 많으니 ‘머잖아 흙으로 돌아가 필경에 흙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이를 통해 화자는 ‘오늘 아침엔 길가의 추운 벤치 위에서 잠시 / 한 잎 가랑잎과 자리를 함께’해 본다고 말한다.
시를 읽으면 알겠지만 이 시 속에는 어떠한 압축이나 생략이 없다. 또 하나 없는 것, 바로 군더더기가 없다. 산문처럼 읽히면서도 술술 리듬에 맞게 읽을 수 있는 것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 때문이다. 그리고 핵심은 마지막 연의 첫 행, ‘생각해보면 나 또한 한 잎 가랑잎’이다. 그 핵심 구절에 오묘한 표현이라든가 멋스런 비유나 상징이 없다. 지극히 담담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화자의 속마음, 생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독자들이 감동을 받는데 바로 화자의 솔직함 때문이다.
특별한 비유나 상징은 없지만 군더더기 하나 없는, 잘 짜여진 문장이 시를 구성하고 있고 끝내는 화자의 삶에 대한 깊은 사유까지 곁들이고 있다. 어디 자랑할 만한 트레킹 코스도 아니요 흔히 말하는 동네 한 바퀴라 할 산책, 젊은 애인, 실직자, 마을버스 종점, 커피 자판기 그리고 벤치…… 특별한 소재가 아니라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우리네 일상 속 인물과 사물들이다. 그런데 화자 자신을 벤치 위에 떨어진 ‘가랑잎 한 잎’과 동일시한 자세, 이는 나이를 먹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가 아니다. 그럴 만한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고이다.
흔히 ‘영혼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들어 시를 젊은이의 갈래라고 말한다. 그러나 때로는 원숙한 경지에 오른 노시인의 시가 이렇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산책길에 본, 벤치에 떨어진 낙엽 한 잎, 무심히 지나칠 수 있겠지만 시인은 그 가랑잎 옆에 앉아 아무나 생각하지 못할 사유를 보여준다. 김종길의 시 '가랑잎 한 잎'을 읽으며 노 시인의 삶에 대한 사유 그리고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그 경지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출처] 이병렬 시인의 '내가 읽은 詩'
/ 2020.12.28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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