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2020.12.28)

푸레택 2020. 12. 28. 14:33

 

 

■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 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감상과 해설]

시 창작 강의를 하다 보면 한 편의 이야기를 시로 만드는 기법에 대하여 질문을 받곤 한다. 이야기라면 소설 혹은 담화식 수필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 속에도 한 편의 이야기가 담길 수 있다. 그것도 일상의 아주 작은 이야기이다. 분명 이야기도 시가 될 수 있다. 손택수의 시 '아버지 등을 밀며'가 그것을 증명한다.

혹자는 이게 어떻게 시냐고 되묻는다. 생활글 한 편을 잘 정리하여 행갈이만 한 것이 아니냐고 따진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생활 속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글쓴이의 감정이 실려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다는 모범적인 사례가 되는 시이다. 시를 보자.

​첫 행에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아들’은 누구일까. 시인 자신일 수도 있지만 한 편의 부자(父子)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들일 수도 있다. 누구면 어떤가. 독자는 시 속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아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만 읽어내면 된다. 아버지는 왜 목욕탕에 아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이는 나중에 나온다.

아들은 아버지가 목욕탕에 데리고 가지 않으니 ‘여덟 살 무렵까지’ 어머니나 누이들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그 동안의 에피소드야 건너뛰자. 이 시에서는 여탕에서 사내아이가 느꼈을 부끄러움보다는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는 아들의 마음이 중요하다.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는 것은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와 아버지가 등을 밀어주는 혹은 아버지의 등을 밀어주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목욕탕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러니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목욕탕에 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살림살이이기에 아버지는 목욕비가 아까워,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생각하고는 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했다. 정말 그랬을까. 정말 돈이 아까워 목욕탕에 안갔을까.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지 않았을까. 다음 행에 그 이유가 나온다.

아들도 이제 성인이 된 어느 날,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다. 병원 환자복으로 갈아입히려 했거나 검사를 위해 옷을 벗겨야 했으리라. 그리고 병원에 있는 욕실에서 아버지의 몸을 씻는다. 그 때 아들은 아버지의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보게 된다. 자식들 먹여 살리려 등짐을 지어야 했던 아버지, 자신의 등에 지게자국이 시커멓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부끄러워서 차마 /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아들은 알게 된다. 아들로서는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던 아버지의 등이지만, 아버지가 왜 아들을 목욕탕에 데리고 가지 않았는지 그리고 지게 자국의 의미까지 알게 된다. 아버지는 등짐을 지고 ‘해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왔다. 그렇게 자식들 부양한 길의 끝에 남은 것은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 자국’이다. 아들에게 부끄러워 보여주지 못했던 그 자국의 의미를 알게 된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들은 아버지의 등에 때를 미는 것이 아니라 환자복으로 갈아입히며 손바닥으로 그 상흔을 쓸었으리라. 시의 제목이 ‘아버지의 등을 밀며’이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삶의 흔적을, 아버지의 등에 ‘낙인처럼 찍’힌 지게 자국을 손으로 쓰다듬었으리라. 그렇게나마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등을 밀고파 했던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다.

시를 읽으면 아버지의 삶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아들의 가슴속 울컥함이 그대로 전달된다. 물론 이런 내용을 길게 줄글로 엮어 생활글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제된 문장 속에 삶의 모습을 담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 - 시로 엮어낼 수 있다. 독자들은 생활글(수필)이나 소설과는 다른, 압축되고 정제된 문장과 그 행간에서 시가 전하는 아름다움을 읽으며 문득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까.

시나 수필이라면 아버지의 등에 난 지게 자국을 보며 지난 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이 표현될 것이지만 시에서는 그런 모습이 없다. 오히려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으로 슬그머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해버린다. 눈물을 짓는 것은 시인이 아니라 독자들이다. 이게 바로 시이다. 생활 속 소소한 일상이 이렇게 시로 만들어질 수 있다.

[출처] 이병렬 시인의 내가 읽은 詩

/ 2020.12.2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