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오누이', '지상의 방 한 칸', '바짝 붙어서다' 김사인 (2020.12.28)

푸레택 2020. 12. 28. 14:24

■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감상과 해설]

내가 사는 동네에 고물상이 있다. 주택가 한 복판인데, 주변 상가와 빌라들이 들어서기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여전히 영업 중이다. 오후가 되면 리어카에 빈 박스나 빈 병 혹은 다른 재활용 고물들을 싣고 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다 노인네들이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거리에 버려진 빈 박스나 병 혹은 폐지를 주워 모아 적으나마 돈으로 바꾸는 생활인들이다.

김사인의 시 '바짝 붙어서다'를 읽다가 자연스레 우리 동네 고물상에 들락거리는 노인들을 떠올렸다. ‘굽은 허리가 /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단다. 우리 동네 고물상에 들락거리는 노인들처럼 폐지를 줍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는 것으로 보아 시 속 풍경도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다. 삶의 고난 속에 폐지를 주우며 살이 빠져, 아니 그만큼 삶이 힘들어 몸빼도 헐거워졌으리라. 정말로 헐거워졌는지는 모르나 화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 벽에 바짝 붙어 선’단다. 화자가 본 것도 우리 동네 골목길과 같은 광경이다.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수 있는 골목길, 마주 오는 것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차를 만나면 비켜 설 수밖에 없다. 그때 생계수단인 리어카를 결코 손에서 놓지 않는다. 몸만이 아니라 리어카까지 함께 차를 피한다. 그러니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자는 이를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라고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가 된다. 차를 피하기 위해서는 밀고 있던 리어카와 함께 거미처럼 가오리처럼 벽에 붙어서야만 한다. 그렇게 피하여 ‘차가 지나고 나면 /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 천천히 다시 펴’지며 이내 리어카를 밀고 가던 길 다시 간다. 당연히 ‘밀차의 바퀴 두 개가 /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화자는 전지적 작가처럼 밀차를 미는 할머니의 삶까지 전해준다. 신문지를 모아 밀차에 싣고 가던 할머니는 늦은 밤에야 집으로 가 고물이 다 된 삼성테레비를 켜 드라마를 보리라. 집 안의 싱크대는 기울었고 냄비들도 이미 낡았으리라.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 목이 메인다’는데 화자의 목이 메는지 아니면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목이 메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팔순을 넘긴 할머니가 어쩌다가 신문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할까. 돌보는 가족이 아니 자식들이 없을까. 화자는 그에 대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신문지를 주워 밀차에 밀고 오다 차를 만나면 벽에 붙어 피하는 모습 그리고 할머니 집 안의 살림살이만 제시한다. 바로 ‘헌 삼성테레비’와 ‘기운 싱크대’ 그리고 ‘냄비들’이다. 게다가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의 할머니이다. 이런 할머니의 모습을 화자는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라고 한다.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자신의 삶을 짜내어 희생한 어머니, 그것도 이제는 더 짤 것이 없어 ‘방 구석’에 던져진 걸레가 된 할머니는 돌보는 사람 없이 홀로 신문지를 주워 연명을 한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니 화자는 목이 메리라. 어쩌면 할머니의 삶에 동화되어 할머니와 함께 목이 멘 것인지도 모른다. 팔순을 담기에도 헐거운 몸빼, 차가 오면 피하려 벽에 바짝 붙어 종이처럼 구겨졌던 할머니의 삶은 정말이지 방 한 가운데도 아니고 구석에, 자식들이 힘주어 다 짜먹은 뒤에 던져놓은 걸레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그 삶을 지탱하기 위한 방법 - 차가 오면 벽에 ‘바짝 붙어서기’이다.

나야 동네에서 늘 보는 풍경이지만 시인은 빈 박스를 주워 밀차에 싣고 고물상으로 향하는 할머니를 보며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라면서, 한 번 더 반복하며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라 한다. 게다가 지금, 그 할머니의 모습은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란다. 시인의 이런 표현들 때문에 자꾸 나까지 시나브로 목이 멘다.

[출처] 이병렬 시인의 '내가 읽은 詩'

/ 2020.12.2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