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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필에세이] 세상사는 이야기.. H에게- 자연예찬 (2020.12.11)

푸레택 2020. 12. 11. 21:31

♤ 식물과 꽃에 관해 알면 알수록 자연은 신비롭고 경이롭게 보인다네. 그러면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외경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지. 심층생태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지. 반면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연을 무시하고 파괴한다네. 유유히 흐르는 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강에 삽질을 할 수는 없지. 아마 4대강을 파헤친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뭔지도 모르는 메마른 감성을 갖고 있는 자들일 걸세. 미국의 초절주의 철학자 겸 시인이었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온 세상을 여행하더라도 자기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없다면 찾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지.

■ H에게, 자연예찬 / 김재필 (미 델라웨이대학 사회학 박사)

자네에게 편지 형식으로 내 생각을 전하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1번째 글이 되는구먼. 그래서 오늘은 좀 가벼운 이야기를 할까 하네. 자네도 내가 꽃을 좋아한다는 건 알지? 우연히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한지 7~8년이 된 것 같네. 그땐 나도 식물과 꽃에 관해서는 속된 말로 젬병이었지. 노란색이나 붉은색 꽃이 피는 백합을 왜 '백합(白合)'이라고 부를까 궁금했던 적도 있다네. 흰색 꽃이 피는 것만 '백합'인지 알았거든.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구먼. '백합(百合)'이라는 이름이 비늘줄기의 비늘조각들이 백 개 합쳐져 있어 붙은 것이라는 걸 몰랐던 거지. 또 백합이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나리’를 개량한 꽃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지. 아마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을 죽을 때까지도 몰랐을 거네.

농촌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내가 알고 있는 식물이름은 벼와 보리 등의 곡물과 고추와 상추 등의 채소밖에 없었네. 들꽃 이름들은 전혀 몰랐지. 아마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하지 않았으면 우리 땅에서 살고 있는 식물들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생을 마감했을 것이네. 꽃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한반도에 어떤 식물들이 나랑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돌아갔을 거야. 달개비, 각시붓꽃, 노랑무늬붓꽃, 털이슬, 주름잎, 삿갓나물, 벌노랑이, 얼레지, 고깔제비꽃, 새팥, 여우콩, 별꽃, 깽깽이풀, 사위질빵, 하늘타리, 이삭여뀌, 봄맞이, 꽃마리, 어리연꽃 등 예쁜 우리말 이름을 가진 식물들이 내 주위에 살고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이제와 생각하니 내가 쉰이 넘은 나이에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네. 과장해서 말하면, 그게 천명(天命)이었던 것도 같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땅에 살고 있는 꽃들도 모르고 갈 뻔 했지 않았는가?

아침마다 옥상에 올라가 새로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방법일까를 생각하네. 강은 바다에 다가갈수록 점점 넓어지는데, 우리 인간은 왜 나이가 들수록 속이 좁아지고 찌질해질까도 생각하지. 그러면서 나만이라도 그렇게 살지 말자고 거듭 맹세해보내만… 프란츠 카프카가 말했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청춘은 행복하다고. 이런 능력을 상실하는 게 늙는 것이고 불행의 시작이라고. 나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할 수 있으면 지질하게 늙지 않을 것이라고 믿네. 그래서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아름다운 것들과 함께 할 생각이라네. 그러면 마음과 정신을 항상 젊게 유지할 수 있을 걸세. 나이 들면 아름다움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헛소리에 속지 말세.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게 노화를 재촉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우리 이 세상 소풍 끝난 날까지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살다가 아름다움에 취해서 즐겁게 돌아가세. 그게 진짜 소풍(逍風) 아닌가?

그런데 아름다움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네. 아름다움과 앎의 어원이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네. 봄이면 동네 산기슭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복사꽃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는 듯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더군. 알아야 눈에 보이고, 알아야 아름답게 다가오는 법일세.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이라는 시가 말하듯, 어떤 꽃이든 가까이 다가가서 눈 크게 뜨고 오래 봐야 그 꽃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네. 그래야 사랑스럽기도 하고. 꽃은 정말로 자세히 보아야 예쁘네. 무슨 꽃을 만나든 그 꽃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습관을 들이게나. 아마 방긋 웃는 꽃님의 미소도 볼 수 있을 것이네.

식물과 꽃에 관해 알면 알수록 자연은 신비롭고 경이롭게 보인다네. 그러면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외경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지. 심층생태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지. 반면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연을 무시하고 파괴한다네. 유유히 흐르는 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강에 삽질을 할 수는 없지. 아마 4대강을 파헤친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뭔지도 모르는 메마른 감성을 갖고 있는 자들일 걸세. 미국의 초절주의 철학자 겸 시인이었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온 세상을 여행하더라도 자기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없다면 찾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지. 이런 면에서도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문제가 많네.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것들을 스스로 찾아보는 습관을 통해 우리들 마음속에 아름다움을 가꾸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또래들 끼리 경쟁만 시키고 있으니… 점점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이 함께 줄어드는 삭막한 사회가 되어가는 거지.

인도 시인 까비르(Kabir)의 시로 이 편지를 마치고 싶네.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 그대 몸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 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 수천 개의 그 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아마 남은 생을 꽃과 함께 살다보면 저런 경지에 이르는 날도 있겠지? 정말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글=김재필 박사ㅣ시사위크 2014.07.21

/ 2020.12.1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