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전한 적이 있었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청춘은 행복하다고. 이런 능력을 상실하는 게 늙는 것이고 불행의 시작이라고.’ 나이 들수록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네. 세상에 공짜로 얻는 건 없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도 그냥 생기는 게 아니야. 주위에 있는 사소한 것들에 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야 아름다움이 보이네. 나이 들면 감각이 무디어져서 아름다움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건 헛소리야.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게 노화를 재촉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걸 잊지 말게나.
■ H에게- 애기똥풀·개망초·민들레의 아름다움 / 김재필 (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꽃이 좋아서 꽃을 찾아다닌 지 어언 10년이 넘었네. 꽃 사진을 찍으려고 식물 공부도 많이 했지. 뭐든 알아야 보이는 법이네. 또 알아야 카메라에 담고 싶어지기도 하고. 무슨 꽃이든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아름답지 않는 게 없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볼수록 예쁘고 오래 볼수록 사랑스러운 게 꽃이야. 오늘은 화려해서 첫 눈에 반한 꽃도 아니고, 희귀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꽃도 아니며, 고귀하게 생겨서 옆에 두고 싶은 꽃은 아니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꽃 몇 개를 소개하려고 하네.
살다 보면 사람 중에도 그냥 좋은 사람이 있지?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잘 생기거나 귀여운 것도 아닌데 함께 있으면 '그냥' 좋은 사람이 있네. 꽃도 마찬가지야. 보기만 해도 그냥 좋은 것이 있어. 난 식물원이나 꽃집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개량종 꽃보다는 야생화를 더 좋아하네. 야생화들 중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꽃들이 좋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근처의 산이나 들판, 개울가, 심지어 도시 변두리의 골목길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애기똥풀, 서양민들레, 개망초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꽃들이야. 난 이런 꽃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네. 옆에 다가가서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정성스럽게 카메라에 담지. 그런 순간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걸세.
애기똥풀은 마을 근처의 양지쪽 언덕이나 숲 가장자리 길섶에서 자라는 양귀비과의 두해살이풀이네. '애기똥풀'이라는 이름도 정겹고, '젖풀', '까치다리'라는 다른 이름도 귀엽지. 많은 사람이 부르기 쉬운 우리말 이름들이어서 더 좋아. 줄기나 잎을 자르면 노란색 즙액이 나오는데, 그게 어린 아기의 노란색 똥 같아서 '애기똥풀'이라는 정겨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네. 게다가 애기똥풀은 사람들 가까이 사는 식물이야. 산에 가서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애기똥풀을 만나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냐고?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가까워졌다는 걸 알려주는 꽃이 애기똥풀이기 때문일세. 그래서 애기똥풀은 이름그대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식물들 중 하나야.
개망초는 국화과의 두해살이풀로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귀화식물이네. 조금 상스럽지만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름이지. 100여 년 전 한일합방을 당하던 때, 즉 조선 왕조가 망할 때 많이 피어서 붙어진 이름이라는 설, 같은 국화과 식물인 망초보다 작아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 개처럼 아무 곳에서나 자라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다네. 마지막 설명이 아무 죄 없는 개를 차별하는 듯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는 않지만 꽤 그럴 듯하게 들리기는 하네. 꽃 모양이 계란을 둘로 갈라놓은 것 같아 계란꽃으로도 불리네. 지금 들이나 숲이 가까운 길에 나가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꽃이야. 봄에 피는 개망초는 봄망초라고 부르기도 한다네. 아무 곳에서나 너무 잘 자라서 농사짓는 분들에게는 아주 귀찮은 존재이지만 난 이 꽃을 매우 좋아하네. 이래저래 천대를 받아도 끈질기게 꽃을 피우고 번식하는 생명력이 경이롭고 신비하거든.
우리가 흔히 보는 민들레꽃은 사실 토종 민들레(Taraxacum mongolicum)가 아니고 서양민들레(Taraxacum officinale)이네. 4~5월에만 피는 토종 민들레는 너무 정숙(?)해서 재생산에 어려움이 많아 점점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지. 토종 민들레는 근친결혼을 싫어해서 서양민들레의 꽃가루가 찾아와 애걸복걸해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네. 토종신랑감만 기다리다 끝내 오지 않으면 수정 능력이 없는 무성의 씨앗을 갖는 처녀임신을 해버리니 서양민들레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이 때문에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도 나왔다는군. 반면에 서양민들레는 꽃이 피는 기간도 토종보다 훨씬 길고(3~10월), 근친교배도 사양하지 않아. 그러니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민들레가 서양민들레일 수밖에 없네. 그런다고 두 민들레에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야. 사실 일반인들은 쉽게 구별할 수 없거든. 그러니 출신을 따져 뭐 하겠는가? 우리 땅에서 뿌리를 내렸으면 둘 다 우리 식물인 거지. 서양민들레는 노란 꽃도 예쁘지만 열매들이 달려있는 모습도 볼만하네. 흰 솜털이 달린 씨들이 공 모양으로 모여 있다가 하나씩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시름이 다 달아나지. 할 수만 있다면 그 솜털을 얻어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가고 싶기도 하고.
오늘 소개한 애기똥풀, 개망초, 서양민들레 모두 적어도 6개월 이상 꽃을 피우는 식물들일세. 또 우리나라 거의 모든 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흔한 꽃이기도 하고. 언젠가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전한 적이 있었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청춘은 행복하다고. 이런 능력을 상실하는 게 늙는 것이고 불행의 시작이라고.’ 나이 들수록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네. 세상에 공짜로 얻는 건 없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도 그냥 생기는 게 아니야. 주위에 있는 사소한 것들에 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야 아름다움이 보이네. 나이 들면 감각이 무디어져서 아름다움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건 헛소리야.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게 노화를 재촉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걸 잊지 말게나.
안도현 시인이 애기똥풀도 모르고 살았던 35년의 세월을 자책하면서 쓴 시 로 오늘 꽃 이야기를 마치고 싶네. 가까운 곳에 있는 흔한 꽃들과 친해지는 노년이 되길 바라네.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글=김재필 박사ㅣ시사위크 2018.05.14
/ 2020.12.11 옮겨 적음
'[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색의향기] '그 붉은 그리움, 꽃무릇' 백승훈 시인 (2020.12.12) (0) | 2020.12.12 |
---|---|
[김재필에세이] H에게- 코로나 시대, 자연과 더 가깝게 (2020.12.11) (0) | 2020.12.11 |
[김재필에세이] 세상사는 이야기.. H에게- 자연예찬 (2020.12.11) (0) | 2020.12.11 |
[명시감상] '시간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샘 레벤슨 (2020.12.11) (0) | 2020.12.11 |
[명시감상] '꽃자리' 구상,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방랑의 마음' '첫날밤' 오상순(2020.12.10) (0) | 2020.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