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공휴일' 김사인, '1년' 천양희, '가을날' 정희성, '가을에' '원시' 오세영 (2020.12.09)

푸레택 2020. 12. 9. 20:00



■ 공휴일 / 김사인  

중량교 난간에 비슬막히* 세워 놓고
사내 하나 가족사진을 찍는데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하나 들춰 업은 촌스러운 마누라는
생전에 처음 일 쑥쓰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착 붙어서
학교서 배운 대로 차렷 하고
눈만 떼굴떼굴 숨죽이고 섰는데
저런, 큰애 곁 다릿발 틈으로
웬 코스모스 하나 비죽이 내다보네
짐을 맡아 들고 장모인지 시어머니인지는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비슬막히: 비스듬히의 방언

■ 1년 / 천양희

작년의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작년의 씨앗들 벌써 꽃 되었다
내가 꽃밭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후딱, 1년이 지나갔다
돌아서서 나는
고개를 팍, 꺾었다

■ 가을날 / 정희성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마음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 원시(遠視) /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의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 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가을에 /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보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 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 2020.12.0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