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보고 싶구나' 김사이, '들꽃' 오세영, '바람이 오면' 도종환, '운' 맹문재 (2020.12.09)

푸레택 2020. 12. 9. 19:24



■ 보고 싶구나 / 김사이

늦은 밤 불쑥 울린 짧은 문자
보고 싶구나
오십 줄에 들어선 오래된 친구
한참을 들여다본다
가만가만 글자들을 따라 읽는다
글자마다 지독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한 시절 뜨거웠던 시간이 깨어났을까
여백에 고단함이 배었다
너무 외로워서 119에 수백 번 허위신고했다던
칠순 노인의 뉴스가 스쳐가며
불현듯 밤잠 설치는 시골 노모가 눈에 맺힌다
더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늙는다는 것 늙었다는 것
몸도 마음도 다 내주고 아무것도 없는
삼류들에게 추억은 왕년의 젊음은
쓸쓸함을 더하는 독주
그저 독주를 들이켜며 시들어가는 현실은
도대체 예의가 없다
나는 오랫동안 답장을 하지 못한다

■ 들꽃 / 오세영

젊은 날엔 저 멀리 푸른 하늘이
가슴 설레도록 좋았으나
지금은 내 사는 곳 흙의 향기가
온몸 가득히 황홀케 한다
그 때 그 눈부신 햇살 아래선
보이지 않던 들꽃이여
흙냄새 아련하게 그리워짐은
내 육신 흙 되는 날 가까운 탓
들꽃 애틋하게 사랑스럼은
내 영혼 이슬 되기 가까운 탓

■ 바람이 오면 /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운(運) / 맹문재

이력서를 낸 곳에 시외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 면접 보러 가는 길
내 이마를 툭 치는, 그것

내게 한마디 하려고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나는 비로소 그것이
들판 그득하게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살아 있는 것도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보았다

그것, 꽉 쥐고 있자니
어느새 내 손바닥은 눈물로 흥건하다

/ 2020.12.0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