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찔레꽃머리' 박영자 (2020.12.09)

푸레택 2020. 12. 9. 14:28






■ 찔레꽃머리 / 박영자 (수필작가)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으슬으슬 추워지면서 오한이 난다.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인다.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 쬐는데도 아래윗니가 덜덜덜 소리를 내며 부딪는다. 양지쪽 담벼락에 기대어 눈을 꼭 감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이러다가 엄마도 못 보고 죽을 것만 같았다. 외할머니는 장터 약방으로 약을 구하러 가셨다. 하루거리가 찾아온 것이다. 이상한 것은 그저께부터 오돌오돌 한축이 나고 아프더니 어제는 멀쩡했다가 오늘은 또 한축이 나니 학교에서 간신히 두 시간을 버티었다. 선생님께서 머리를 짚어보시더니 안 되겠다며 집으로 보내주셨다. 선생님은 학질(瘧疾)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쓰디쓴 노란색 금계랍을 구해 오셨다. 우리는 그 때 그 약을 깅게랍이라고 촌스럽게 불렀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쓴 약은 없지 싶었다. 넘어가지 않는 약을 채근하는 할머니 눈빛이 애처로워 억지로 삼켰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이 쓰디 쓰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집 뒤로 난 향림으로 넘어가는 오솔길로 비틀비틀 걸어가셨다. 아홉 살짜리가 업히는 것이 민망했지만 할머니 등이 아랫목처럼 따뜻해서 얼굴을 묻고 진드기처럼 등을 파고들었다. 한낮의 햇살이 내 속눈썹 끝에서 아른거렸다. 건너편 짙푸른 토끼봉에서 뻐꾹 뻐꾹 뻐꾸기가 처량하게 울어댔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한참을 올라가 찔레꽃이 덤불져 하얗게 핀 언덕배기에 나를 내려놓으신 할머니는 두 손 모아 합장하곤 빌고 또 빌었다. 서리병아리처럼 병약한 손녀딸을 위한 할머니의 비손은 간절하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절절한 기도였다.

어질 머리가 나는데도 다복다복 셀 수도 없이 피어있는 찔레꽃의 하얀 웃음이 반가웠다. 다섯 장의 하얀 꽃잎이 할머니의 옥양목치마보다 더 새하얗고 꽃잎 한가운데 포슬포슬한 노란 꽃술은 금계랍 색깔보다 더 노랗다. 찔레꽃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나기는 처음이다. 은은한 꽃향기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언덕배기 밑에 순자네 보리밭은 누렇게 익어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였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풀을 헤집고 무언가를 뜯기에 분주하셨다. 그것을 달여 약으로 먹였지만 무슨 풀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할머니와 나는 가끔 그 찔레꽃 더미 앞에서 둘만의 지순지결(至純至潔)한 사랑을 익혀갔다. 어느 날은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한주먹 따서 먹기도 했고, 찔레나무 여린 햇순을 따서 껍질을 벗겨 먹던 일도 할머니에게 배웠다. 비릿하면서도 달착지근하던 그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밭에 갔다 오시며 오솔길 모퉁이에서 연분홍 메꽃을 따다 내손에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검버섯 핀 따스한 손길이 그립다. 열 살이 되던 이듬해 할머니와 떨어져 엄마와 함께 살면서도 내 마음은 온통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요, 기다림이었다.

사범학교 2학년, 열여덟 살 되던 해 5월, 찔레꽃머리 보리누름에 외할머니는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꽃상여를 타고 향림으로 넘어가는 그 오솔길을 넘어 가셨다. 그 날도 찔레꽃은 그 자리에 하얗게, 하얗게, 번지며 피어있었다.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떠올리며 나는 찔레꽃 더미 앞에서 오열하였다. 할머니의 꽃상여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주춤거렸다.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떨어져 살던 엄마는 내 아픔을 짐작이나 했을까. 나는 그 해 외할머니를 여읜 슬픔으로 한동안 비틀거렸다. 사춘기 소녀는 그때부터 슬픈 게 뭐라는 걸 조금씩 알아갔다.

수십 년이 흘러 일흔이라는 무거운 나이를 부담스러워하던 그 해 5월,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가장 쓰라린 일로 허물어졌다. 동반자를 잃은 슬픔은 어떤 말로도 표현 할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고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청천벽력이었다. 남편을 산에 묻고 경황없이 돌아오는 차속에서 눈물도 말라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산기슭 양지바른 밭두렁에 새하얀 찔레꽃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찔레꽃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잿빛 슬픔이 안개처럼 몰려온다. 아! 어쩌자고 찔레꽃은 오늘도 나에게 또 서러움을 부추기는가.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찔레꽃의 손짓은 내 가슴에 또 한 켜의 앙금을 쌓았다.

계절의 여왕 5월은 얼마나 찬란한가. 연초록과 초록 사이로 계절이 스쳐 지나갈 그 때가 나에게만은 견디기 어려운 잔인한 달이 되었다. 순박한 꽃, 하얀 꽃, 찔레꽃은 나에게 한없이 슬픈 꽃으로 각인 되었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던 산골 소녀 찔레의 무덤에서 피어난 슬픈 넋이라지만 나를 울리는 꽃이 되었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장사익이 온몸으로 부르는 찔레꽃 노래를 나는 끝지 듣지 못한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 너무 서러워 차마 듣지 못한다.

/ 2020.12.0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