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미 / 정희성
매미도 나무를 붙들고
울고 싶었을 것이다
몸 가눌 길 없는 슬픔으로
매미도 기대 울고 싶은
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땅속에서 몸부림치다
한여름 며칠쯤은 하늘을 바라
허물을 벗어놓고 울고 싶었을 것이다
■ 두문동 / 정희성
자세를 낮추시라
이 숲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여기는 풀꽃들의 보금자리
그대 만약 이 신성한 숲에서
어린 처자처럼 숨어 있는
족도리풀의 수줍은 꽃술을 보려거든
풀잎보다 더 낮게
허리를 굽히시라
■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 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 정희성
너도밤나무가 있는가 하면 나도밤나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바람꽃은 종류도 많아서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변산바람꽃 남방바람꽃 태백바람꽃 만주바람꽃 바이칼바람꽃뿐만 아니라 매화바람꽃 국화바람꽃 들바람꽃 숲바람꽃 회리바람꽃 가래바람꽃 쌍둥이바람꽃 외대바람꽃 세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등 종류도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꽃이 아름답다
어떤 이는 세상에 시인이 나무보담도 흔하다며 너도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시인이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전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이해와 감상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구체적 삶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있다. 노동의 현장에서 오는 삶의 경험을 강이라는 자연물의 심상과 결합시켜 깊은 시적 의미를 얻고 있다. 노동은 인간이 세상에 참여하는 건실한 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지고 진실한 노동의 가치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보다는 부당하게 취급당하기 일쑤이다. 노동에 바치는 땀에 대한 부당한 취급은 시인이 분노하고 개탄해마지 않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현실에서 느끼는 분노와 고통을 시인은 흐르는 물을 보며 씻어 버리며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는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는 표현에는 탄식과 반성이 깃들어 있다. 탄식을 주목하게 되면 우리는 공자가 남겼다는 '가는 것은 이와 같아서 밤낮 쉬임이 없다(逝者如斯 夫不舍晝夜)'는 탄식과 만난다. 이 시에서 쉬임 없이 '흐르는 물'의 심상은 시간의 흐름과 동등한 의미 연관을 지닌다. 저문 강에 선 하루의 저녁은 인생의 저묾과 중첩되고 있다. 따라서 묵묵한 노동의 성실함이 가져온 하루의 저묾에 대한 성찰은 '삽자루에 맡긴' 인생의 저묾에 대한 성찰과 대응한다.
흐르는 물이 가지는 풍부한 내포는 시간의 흐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흐르는 물이 가지는 풍부한 내포에 기댐으로써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순간과 연장을 씻듯이 노동의 삶에 깃들인 슬픔도 씻어내는 정화(淨化)의 순간을 가질 수 있다. 시의 화자가 노동의 피로와 슬픔을 씻어내며 바라보는 흐르는 물은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강은 고단한 하루를 씻어줄 뿐 아니라 의연한 깊이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살이에 지친 시적 화자에게 위안을 준다.
고작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며 돌아갈 뿐인 시의 화자에 비해 강으로 대표되는 자연은 우리가 일상 삶에서 간과해 버린 지혜를 담고 있다. 저물고 저물어 어둠이 깊어가면 비록 썩은 물일지라도 캄캄한 세상을 밝히는 빛을 담아낼 수 있다. 인간에 의해 썩어 가는 강에 비친 달에서 노동의 피로와 우울한 심경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달이 저문 강을 비추고 다시 돌아가듯이 그는 강을 떠나 빈한한 인간의 마을로 되돌아가야 한다. 삶이란 사실상 끊임없는 순환과 반복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다짐은 고단한 삶에 대한 따뜻한 긍정이며 공동체적 삶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소박한 다짐이 거창한 구호보다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상 삶의 질서를 성급하게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한 자기확인의 태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ㅡ 해설: 유지현
/ 2020.12.09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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