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수채화 같은 풀꽃' 박영자 (2020.12.09)

푸레택 2020. 12. 9. 13:57






■ 수채화 같은 풀꽃 / 박영자 (수필작가)

개망초꽃이 하나 둘 피어난다 했더니 어느새 언덕길을 하얗게 메우고 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꽃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섬세한 하얀 꽃잎들이 돌려 붙고 가운데 샛노란 꽃술이 선명한 게 그 꽃 나름의 수수하면서도 귀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개망초꽃 한 송이를 따 들고 '계란후라이꽃'이라고. 그러고 보니 영락없는 계란후라이였다. 그 때부터 그 꽃 속에서 무한한 동화가 피어날 것 같고 소꿉장난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려 오기도 한다. 하나 둘 피어 있을 때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꽃들이 무리 지어 피면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함박웃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아름다움이 배가되어 화폭에 담아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이제 이 언덕에 건들마가 나고 풀잎들이 발긋발긋 곱게 화장을 하기 시작하면 보랏빛 쑥부쟁이꽃들이 파란 가을 하늘을 이고 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그때쯤 나는 또 향수병에 시달리리라. 하얀 개망초꽃, 보랏빛 쑥부쟁이꽃, 노란 들국화가 내 사랑을 독차지하고 번갈아 화폭에 담기던 그 시절 그 가을이 마냥 그리워서 말이다.

열 아홉에 나는 조그만 시골 학교 여선생이었다. 처음 접하는 시골 생활은 신기하고 호젓하고 여유로웠다. 퇴근하고 나면 산으로 들로 휘젓고 다니면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꽃들과 이야기하고 맑은 영혼의 새들과 함께 노래하는 수채화 같은 투명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지치면 모래가 유난히 뽀얗던 냇가 바위에 앉아 맑은 물 속에서 한가롭게 노는 물고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빛 물고기들이 공중으로 수없이 튀어 오르는 장관을 이룬다. 그것들이 왜 저녁때가 되면 수면 위로 뛰어 오르는지 늘 궁금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꼭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고 가을 바람 한 자락이 내 가슴을 휘몰고 지나가면 막연한 그리움이 가슴 가득 고여 온다. 한참을 그렇게 망연히 앉았다 보면 회색빛 땅거미가 내리고 서둘러 냇가 언덕에 흐드러진 쑥부쟁이꽃을 한 아름 꺾어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오지 항아리에 꽂힌 그 꽃으로 하여 풋풋한 꽃냄새와 충만한 기쁨이 방안 하나 가득하다. 나는 그 감동을 놓칠세라 얼른 화지를 펴놓는다. 자잘한 꽃들을 그리는 연필소리가 사각사각 방안을 채운다. 붉은색과 푸른색, 그리고 유리병 속의 투명한 물을 섞어 신비스러운 연보라를 만들어 보지만 이래도 저래도 만족할 만한 그 보랏빛이 만들어지질 않는다. 등잔불 밑에서 팔레트에 섞인 물감은 붓끝에서 빙글빙글 섞이다가는 씻겨 나가기를 수 차례, 어찌어찌 그 꽃빛깔에 가깝다고 만든 물감을 화지에 칠해 보면 역시 또 그 빛깔이 아니다. 밤늦도록 붓을 놀리다가 잠이 들고 아침에 깨어 보면 어젯밤에 그렇게도 싱싱하던 꽃잎은 한 잎도 남지 않고 오롯이 떨어져 책상 위에 방바닥에 보랏빛 그림자로 드리워 있다. 미완성의 그림 한 장이 슬픔처럼 남아 있던 그 허망함이라니…. 그래도 나의 풀꽃 그리기는 그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계속되곤 했다. 만족할 만한 그림 한 장 그려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끝내 소원은 이루지 못했고 그 곳을 떠나면서 나의 풀꽃 그리기도 막을 내렸다.

이루지 못한 꿈이기에 지금도 문득문득 붓을 들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그 때마다 내 마음의 화폭에는 하얀빛, 보랏빛, 노란빛 풀꽃들이 하나 가득 피어오르곤 한다.세월이 많이도 흘러갔다. 쉰을 넘기고 나는 또 나그네처럼 어느 조그만 시골 학교에 짐을 풀었다. 전교생이 86명인 성냥갑 같은 학교였다. 뒷동산에서, 학교의 정원수에서 지저귀는 산새들의 맑은 노래가 내 감성을 일깨웠다. 도시 학교를 전전하면서 때묻고 찌들은 내 영혼을 맑게 헹구고 싶었다.

아이들 눈동자는 맑았으며 학교는 늘 절간처럼 고요했다. 아이들이 좀 떠든대도 그 소리들은 넓은 들판으로, 탁 트인 푸른 하늘로 흩어져 갔다. 내 반 아이들 열 한 명과 자주 뒷동산에 올랐다. 봄볕이 소복이 모여 노는 무덤가에는 할미꽃이 수줍어 고개를 숙이고 조팝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좀 있으면 진달래꽃이 밀물처럼 밀려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여름방학이 가까워 올 무렵이면 온 산에 마타리가 지천이었다. 노란 색과 하얀색 마타리가 어울려 핀 환상적인 그 꽃무리는 내 마음을 쏙 빼앗았다. 아이들은 잘 잘라지지도 않는 마타리 줄기를 억척스럽게 잘라다 내 품에 안겨주었고 나는 어느 나라 공주 부럽지 않게 행복했었다. 내 책상 위에 공작대 위에 아이들 책상 위에도 온통 마타리꽃으로 장식했다. 나는 또 붓을 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스케치하는 내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아이들은 나를 에워쌌다. 너무 오랜만에 잡은 붓이니 제대로 된 그림을 기대하기보다는 열아홉 시절의 풀꽃 추억을 반추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아주 말라버렸을 줄 알았던 내 감성이 가슴속 어딘가에 숨어 흐르다 분수처럼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내 꽃병이 빌 새 없이 풀꽃들을 열심히 꺾어다 꽂았다. 산나리, 까치수염, 달맞이꽃, 쥐손이풀꽃, 용담꽃, 산패랭이, 오이풀꽃, 쑥부쟁이, 억새…. 꽃들이 계절 따라 내 꽃병을 거쳐가는 동안 세월은 잘도 흘렀고 나는 또 그 아이들과 풀꽃을 남겨 둔 채 도시로 흘러들어 왔다.

​도시에서 만난 아이들의 기억은 희미해져 가는데 풀꽃을 꺾던 시골 아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왜일까. 막연하지만 언젠가는 풀꽃 피던 그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 때쯤 그 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 2020.12.0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