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해와 감상]
1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읽을 때마다 참 멋진 시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존재의 의미성의 '꽃'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 시는 인간관계에 있어 내 존재를 알리고, 상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잘 알게 합니다.
이를 잘 알게 하는 것이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지만,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땐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은 '존재'로서의 실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시인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길 갈망하고 자신도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고 싶어 하지요. 나아가 시인은 우리 모두는 무엇이 되고 싶어 하고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존재가 되고,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막히게 되면 자신의 존재도 모두의 존재도 가치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의미 또한 상실하게 되지요. 그런 까닭에 시인의 말처럼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또한 우리 모두는 잊혀지지 않은 의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ㅡ '시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옥림, 미래북스, 2019)
2
한국시사에서 꽃을 제재로 한 시는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기 위한 소재로 꽃을 파악한 것이거나, 심미적 대상으로서 꽃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꽃'을 다루고 있어, 그만큼 심도가 깊다. 여기서 꽃은 하나의 구체적인 실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인의 관념을 대변하는 추상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존재 탐구의 시인 김춘수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이 시는 서정성이 일체 배제된 관념적이고 주지적인 작품이다. 처음엔 무의미의 관계였던 '나'와 '그(너)'가 '이름을 불러 주는' 상호 인식의 과정을 통해, 서로는 서로에게 '꽃'이라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변모하게 되고, 마침내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있는 존재인 '꽃'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명명(命名)' 행위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고, 그것을 실재적인 형상으로 표현해 내는 작업을 뜻하게 된다. 이것은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파악한 하이데거의 명제와 비슷한 시적 발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존재를 조명하고 그 정체를 밝히려는 이 시는 주체와 객체[대상]가 주종(主從) 관계가 아닌, 상호 주체적 '만남'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다. 모든 존재는 익명(匿名)의 상태에서는 고독하고 불안하다. 그러므로 이름이 불려지지 않은 상태[존재를 인식하기 전]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에게서나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명명(命名)이라는 과정이 있기 전까지는 참다운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부재(不在)의 존재였던 '꽃'이 이름을 불러 주는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양태를 지니게 되며, 반대로 내 존재도 누가 나의 이름을 명명할 때야만, 부재와 허무에서 벗어나 그에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3
이 시는 시인이 교사로 재직할 무렵, 밤늦게 교실에 남아 있다가 갑자기 화병에 꽃힌 꽃을 보고 시의 화두가 생각나서 쓴 것이라고 한다. 꽃의 색깔은 선명하지만, 그 색깔은 금세 지워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론적 위기를 충동질했는지 모른다. 이 시는 '꽃'을 소재로 '사물'과 '이름' 및 '의미' 사이의 관계를 노래한 작품으로, 다분히 철학적인 내용을 깔고 있어서 정서적 공감과 더불어 지적인 이해가 또한 필요한 작품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널려 있다. 이것들이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전에는 정체불명의 대상에 지나지 않다가, 이름이 불리워짐으로써 이름을 불러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식이 되어진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것은 최소한 그에게만큼은 내가 의미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에, 시적 화자 역시 자신의 참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을 불러줄 그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다. 단순히 작위적이고 관습적인 이름이 아니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존재론적 소망이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의미의 전개 과정은 아주 논리적이다. 이러한 의미 전개의 논리성은 우리 인식의 과정과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다. 1연에 제시된 그의 '몸짓'은 '명명'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2연에서 '꽃'으로 발전되고, 여기서 확인된 논리적 흐름을 근거로 하여 3연에서 '나'의 경우로 의미가 전이된다.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 후, 4연에서 우리 전부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보편적 맥락으로 시를 종결짓고 있는 것이다.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數千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샤갈의 '나와 마을'
이 그림은 샤갈이 자신의 유년 시절 체험을 자유롭고 몽상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화면 양쪽에는 암소의 머리와 샤갈 자신의 얼굴이 차지하고, 멀리 교회와 집들이 있으며, 농기구를 짊어진 농부와 우유를 짜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꽃이 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샤갈은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파리에 와 있는 나에게는 고향 마을이 암소의 얼굴이 되어 떠오른다. 사람이 그리운 듯한 암소의 눈과 나의 눈이 뚫어지게 마주 보고, 눈동자와 눈동자를 잇는 가느다란 선이 종이로 만든 장난감 전화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2020.12.07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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