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과학칼럼] '동백꽃과 동박새' 권오길 (2020.12.08)

푸레택 2020. 12. 8. 09:02



■ 동백꽃과 동박새 / 권오길

동백꽃을 놓고 조촐함이 매화보다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살을 에는 이 한겨울에도 싸~싸~ 출렁이는 바닷물소리 들으며 '빨갛게 멍든 꽃'을 흐드러지게 달고 외롭게 서있을 고결한 네가 그립다. 가끔은 강한 해풍에 흩날려 온 짠 소금물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겠지. 겨울채집을 하면서 허기진 배를 너의 화밀(花蜜, 꽃물)로 달래던 그 처참함이 이제는 아스라이 그리움으로 돌아오는구나. 꽃잎을 통째로 따서 주둥이를 입에 넣어 쭉쭉 빤다. 나를 구황(救荒)한 고맙기 그지없는 달큼했던 너! 실은 세한(歲寒)의 설중동백(雪中冬栢)인 너에게서 고맙게도 인고를 배웠었지.

동백나무는 딱딱하고 매끄러운 줄기에다 광택 나는 이파리, 새빨간 꽃이 특징이다. 주로 바닷가에 군락을 이루는데, 섣달이면 벌써 저 남쪽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오는 해 사월까지 화려한 꽃잔치를 이어간다. 주로 중부 이남에 자생하며 동해안은 울릉도가, 서해안은 대청도가 북방한계선이다. 우리나라 동백은 모두 홑꽃이며 부숭부숭 여러 겹으로 피는 것은 일본 동백이다. 꽃받침과 꽃잎은 모두 다섯 장이고, 암술 하나에 둘러 난 여러 개의 수술은 꽃잎 아래에 달라붙어 있으며, 후두두 꽃잎이 떨어지는 날이면 암술만 혼자 남는다.

동백나무 잎은 염료나 모기향으로 쓰고, 재목은 단단하여 악기나 농기구를 만들며, 열매 속 씨(보통 3개씩 듦)는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으로 쓴다. 바닷가 할머니들이 동백 씨 주워 소쿠리에 말렸으며, 아낙네들은 동백기름 듬뿍 바르고 참빗으로 자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를 곱게도 빗어 내렸고, 꽃잎으로 전까지 부쳐 먹었다. 이렇게 조상들의 애잔한 삶의 때가 묻어있는, 귀염 받아도 마땅한 나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만 핀 꽃을 좋아한다. 정녕 미개(未開: 피지 않은)한 꽃에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이 숨어있고, 다 핀 것에는 낡은 시듦이 들어있어 싫다. 그러나 지는 꽃이 더 진한 향기를 풍긴단다. 한데, 꽃이 이운 자리에는 씨가 맺히기에 그는 낙화를 서러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찬바람 쌩쌩 불어대는 겨울에 핀 동백꽃은 무슨 수로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일까. 수분을 했기에 검고 딱딱한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닌가. 그 샛노란 꽃가루를 옮길 나비와 벌이 얼음추위에 나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바람이 꽃가루를 옮기는 풍매화(風媒花)도 아니다. 동백꽃은 새가 꽃가루를 날라주니 조매화(鳥媒花)로,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긴다. 이 새는 '굴뚝새'와 같이 떠돌이새(漂鳥)로 여름에는 높은 산에서 살면서 나무에 집을 지어 번식하고 곤충이나 송충이를 먹는데 벌레가 없는 겨울엔 산 아래로 내려와 나무열매나 동백꽃의 꿀물을 먹는다. 동백나무와 동박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질긴 연의 끈으로 묶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예쁜 꽃은 진한 향기가 없는 대신 아주 달콤한 꿀을 잔뜩 품고 있다.

더 긴 이야기를 해 무엇 하랴. 애련(哀戀)에 피 멍든 당신!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네…." ㅡ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출처] 경향신문 (2009.02.05)

/ 2020.12.0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