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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고추 매운 맛의 비밀' 권오길 (2020.12.07)

푸레택 2020. 12. 7. 20:28



■ 고추 매운 맛의 비밀 / 권오길

요샌 고추 말리기로 눈코 뜰 새가 없다. 벌써 세물 째로, 오늘도 소나기가 올 것이란 예보에 온통 신경이 하늘/고추에 가 있다. 비가 오면 고추를 못 말리고 가물면 배추가 목이 타들어가는 형편이니 우산장사와 짚신장사 하는 두 아들을 둔 꼴이 되었다. 지난 5월 5일 한 뼘쯤 되는 가녀린 고추 모종 250그루를 사다 신명나게 심고 나니 내 허리가 아니었다. 심어만 놓으면 되는 게 아니다. 뒤치다꺼리가 남았다. 고춧대에 버팀목 세워 끈으로 꽁꽁 매주고, 밑동에 난 곁순 치고 비료를 줘야 한다. 그것들이 뭉실뭉실 커서 유월이면 Y자로 짜개지는 방아다리 가지가지 사이에 접시 꼴의 하얀 꽃이 한 개씩 열린다. 녹색인 꽃받침은 끝이 5개로 얕게 갈라지고, 꽃잎은 타원형으로 5개이며, 길쭉한 암술 1개에 수술 5개가 가운데로 모여 달린다. 석 달이 지나 8월 초면 파란 고추가 익어 어느새 핏빛 고추 되어 대롱대롱 달리기 시작하니 사람의 넋을 홀랑 다 빼놓는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꼴로 따준다. 내 밭에는 가을이 이미 왔다! 수확의 기쁨이라니!? 갓 딴 물고추를 바로 햇볕에 내놓으면 뙤약볕(자외선)을 받아 껍질이 물러버리기에, 2~3일 그늘에서 시들시들하게 숨죽인 다음(껍질이 수분을 잃고 딱딱해짐) 펼쳐놓는다. 지글지글 내려 쬐는 땡볕에 널어놓은 고추는 손을 대지 못할 만큼 뜨겁다. 지금 심은 저 배추가 통배추 되고, 지금 말리는 고추가 양념가루 되어 만나는 날이 김장 날이다! 배추김치 한 이파리에 농부의 피땀이 어려 있음을 나는 안다.

풋고추 하나에 들어있는 비타민C가 귤의 네 배나 된다고 하더라. 풋고추는 익어가면서 새빨갛게 바뀌니 그것은 홍색인 캡산틴(capsanthin)이란 색소가 생겨난 까닭이고, 고추가 매운맛(실은 맛이 아니고 통각임)을 내는 것은 캅사이신(capsaicin, 고추의 속명인 Capsicum에서 따옴)이란 물질 때문이다. 호호 맵다. 얼마나 맵기에 옛날 어른들이 고초(苦草), 먹기에 고통스러운 풀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물론 그 매운맛은 고추가 다른 미생물(세균, 곰팡이 바이러스)이나 곤충에 먹히지 않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자기방어물질인 것이다.

고추(hot pepper)는 남아메리카 볼리비아가 원산지로 열대지방에서는 여러해살이풀(多年草)로 풀(草本)이 아니고 나무(木本)다. 고추나무는 가지과(科) 식물로 가지, 감자, 토마토, 담배들은 꽃이 서로 닮았다. 근데 어디 거친 땅 푸서리에 잘 사는 놈 있나. 고추는 고온성작물로 거름을 많이 주고, 반드시 돌려 심기(윤작)를 해야 한다. 거저 얻는 것 없다. no pain, no gain! 곡진한 보살핌이 있어야 하니 곡식은 주인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는 것. 한국의 여러 고추 종류(품종) 중에서 '청양(경북 청송과 영양의 준말)고추'가 아주 유명하고, 맵지 않은 꽈리고추도 청양고추 가까이에 있으면 꽃가루가 옮겨 붙어 매워지고 만다(70%는 타가수분, 30%는 자가수분을 한다함).

일부러 애써 헤아려 보았다. 큰 고추 하나에 씨앗이 145개쯤 들었고, 한 그루에 70~80개의 고추가 달리니, 고추 씨 하나에서 145×75=1만875여개의 씨앗이 생긴 셈이다. 일 만 배가 넘는 새끼를 남기다니…. 정말 다산(多産)이로다! 그래서 아들을 놓으면 왼 새끼 인(人)줄에 고추를 매다는가 보다. ㅡ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생물학

[출처] 경향신문 (2009.08.20)

/ 2020.12.07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