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과학칼럼] '독야청청의 비밀, 부동액' 권오길 (2020.12.08)

푸레택 2020. 12. 8. 08:51



■ 독야청청의 비밀 '부동액' / 권오길

입동 절기가 이미 지났으니 속절없이 이제 겨울이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한다지. 그것들은 어찌 겨울에 얼어 죽지 않고 독야청청한단 말인가. 월동하기란 사람도 그렇지만 어느 생물들에게나 죽살이치는 일이다. 필자는 추운 동절(冬節)에도 오후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등성이를 걷고 뛴다. 물론 길가에 서있는 나무들과 수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길섶 가까이 진달래와 산철쭉이 있고 나머지는 온통 소나무 숲이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의 푸름을 안다"고 한다. 소나무 말고는 죄다 잎사귀를 털어버리고 본색을 드러낸 황량한 산모퉁이를 돌아 내닫는다.

머잖아 한파가 들이닥칠 것이다. 소나무나 대나문들 어찌 이 찬 기운에 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겨울 밤에는 여느 소나무나 잎이 철심같이 꽁꽁 얼어 빳빳이 굳는다. 영하 20도가 넘는 매서움에 눈가루 그득 뒤집어써 허리가 휘청이는데 바람까지 뒤흔들어대니 죽을 맛이다. 말 그대로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로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으나 바람이 자지 않는구나! 암튼 아무리 추워도 솔과 대는 끄떡 않고 잘도 버틴다.

용케도 바깥이 추워도 세포 안에는 얼음 결정이 생기지 않고 세포와 세포 사이의 틈새에만 결빙이 되기에 세포가 얼어 터지지 않는다. 세포 밖으로 물이 빠져나가 쭈그러들지만 안은 멀쩡하다. 즉 세포 틈새의 얼음알갱이가 세포 속의 물을 빨아내 세포 자체는 탈수상태가 되지만, 물이 빠져나간 세포는 상대적으로 용액의 농도가 높아져서 빙점을 낮춘다. 이렇게 상록수들은 괴이한 술법을 쓴다.

덧붙이면, 날씨가 차가워지면 나무의 세포 속에는 프롤린이나 베타인 같은 아미노산은 물론이고 설탕 등 탄수화물도 증가해 얼음 핵이 생기는 것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물질들이 바로 '항(抗)결빙' 물질이요, 다시 말해서 부동액인 셈이다. 이렇게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당분을 세포에 축적하는 것을 '담금질'이라 한다. 옛날에 비하면 요새는 한강이 덜 언다고 한다. "더러운 물은 깨끗한 물보다 잘 얼지 않는다"는 뜻일 게다.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다른 유기물 용질이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고, 식물세포에도 여러 용질이 늘어나 농도가 짙어지니 그것이 추위에 대한 순응(順應)이요, 저온에 대한 적응(適應)이다. 맹물이 소금물이나 설탕물보다 잘 언다는 것을 말 못하는 저 식물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니….

그리고 휴면 중인 바싹 마른 씨앗은 영하 196도에서도 너끈히 견딘다. 그러나 저온에 천천히 순응할 기회도 없이 벼락 추위가 엄습하면 별수 없이 세포가 쩍쩍 갈라 터져버린다. 어느 식물을 2도에서 천천히 영하 85도까지 내려도 멀쩡했으나, 같은 온도에서 재빨리(1분 만에) 8도를 낮췄더니 죽더라는 것이다.

천고마비라, 가을이 되면서 지방 축적으로 말이 살찌듯 식물들도 세포 안에 아미노산이나 당분 등 여러 물질을 쌓아 세포액의 농도를 올려서 얼어 죽지 않는다. 그 아픈 송곳 겨울을 이겨내는 데에는 바로 이런 부동액의 신비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ㅡ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출처] 경향신문 (2008.11.13)

/ 2020.12.0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