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설 내린 강릉의 눈꽃 설경, 그해 겨울의 추억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 한 토막.
'2014년 2월 6일부터 14일까지 9일 동안 강릉지역 내린 폭설은 1911년 강릉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장 기간 눈이 내렸다. 눈은 2월 17~18일 또다시 내려 13일 동안 총 11일 눈이 내렸다. 누적 적설량은 179.4㎝에 달했다.'
강릉에 기상 관측 이래 백 년만에 최대 폭설이 내렸다는 그 해, 그때 나는 강릉에 살고 있었다. 교직에서 명퇴하고 강릉에 내려가 살면서 맞이한 첫해 겨울, 폭설이 내렸다. 열하루 동안 내린 눈의 누적 적설량이 내 키보다도 높은 179cm라 했다. 시내로 나가 보았다. 중앙시장과 신영극장 버스 정류장 앞에는 도로에서 밀어낸 눈이 내 키보다 더 높은 눈더미가 되어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폭설로 교통이 막혀 큰 불편을 겪었고 생업에 막대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 보상으로 자연이 주는 온통 눈꽃 세상인 환상적인 설경, 그 꿈속 같은 설국(雪國)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으니 세상 일이란 명암이 있게 마련인 것 같다.
40년 전 나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복무를 했다. 강원도의 겨울은 어찌 그리도 춥고 길던지, 체감 온도 영하 30도라고 했다. 눈은 또 어찌 그리도 많이 내리던지, 치워도 치워도 소복소복 쌓이는 눈. 어느 해는 5월에도 눈이 내렸다. 4월에 내리는 눈이 아니라 5월에 내리는 눈이었다. 그땐 눈이 싫었다. 혹독한 추위가 정말 싫었다. 30개월 군복무를 하며 세 번의 겨울을 강원도 땅에서 보냈다.
인생이란 알 수 없는 일이다. 명퇴를 하고 강원도 땅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젊은 시절 군복무로 내 뜻과 관계없이 거주했던 강원도 땅으로. 첫해 겨울, 또 추위와 눈을 맞닥뜨렸다. 강릉은 양구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런데 양구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렸다. 총을 메고 푹푹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따라 야간 초소로 가지 않아도 되는 그해 겨울에 내렸던 폭설은 마냥 포근하기만 한 이불이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꽃 설경은 봄날의 벚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가뭄과 홍수, 지진과 해일, 폭설과 한파 앞에서는 인간은 한없이 초라한 생명체가 된다. 자연 앞에 인간은 늘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요즈음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여 집콕을 하다 보니 옛 추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6년 전 강릉에 거주하며 폭설이 내렸을 때 찍은, 눈 내린 날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다시 꺼내어 포스팅을 하며 그때 그 꿈속 같았던 설국의 시절을 잠시 추억해 본다. 메마른 감성에도 詩心이 찾아온다.
● 그리움 안고 쏟아지는 함박눈 / 택우
함박눈 펑펑 쏟아지던 날
살포시 내려앉은 눈꽃은
봄날의 벚꽃보다 아름다운데
나뭇가지 눈꽃 무게 견디며
목련은 꽃잔치 흥겨울 봄을 기다리고
동네 꼬마 녀석들은
눈썰매를 타고 눈사람을 만든다
나는 너를 향한 그리움 안고
커다란 함박눈 눈썹 위에 쏟아져
시린 눈 속에 파고드는 길을 걷는다
함박눈은 밤새
휴전선 초소에도 내려 쌓이고
나는 전선의 밤을 지키는
스무살 청년이 된다
적막한 깊은 산골짜기
소리없이 내려 쌓이는 함박눈은
나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덮으며
새살이 되어 돋아나는데
문득 뒤돌아보니
너는 젊은 그 모습 그대로인데
하얗게 시린 내 마음 속 겨울엔
스무살 나와 예순살 내가
친구되어 눈 쌓인 산길 걸어간다
■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 쭈삣쭈삣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1912~1996)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소주)를 마신다
燒酒(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ㅡ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詩) 전문(全文)
■ 폭설 / 도종환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 2020.12.06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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