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의 미래, 세상의 모든 종자 / 조홍섭
1941년 7월 히틀러의 군대가 폴란드를 넘어 소련을 침공했다. 스탈린(Iosif Stalin)은 독일에 빼앗겨서는 안 되는 문화유산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급히 옮겼다. 거기에는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미술품과 함께 현대 작물육종의 창시자인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v)가 전 세계의 풍요로운 농촌을 돌며 수집한 씨앗과 뿌리와 열매의 표본이 들어 있었다. 나치는 레닌그라드를 872일 동안 봉쇄했고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끔찍하게 추웠던 1941~1942년 겨울, 식품 공급이 모조리 끊기고 포탄이 날아다니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고양이, 개, 쥐, 쓰레기, 심지어 다른 사람까지도 먹었다. 하지만 상트이사크 광장 지하실에 있는 씨앗과 뿌리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종자가 전쟁이 끝난 뒤 소련 인민을 먹여 살릴 마지막 자산이라고 굳게 믿은 바빌로프의 동료 과학자와 직원 8명은 감자포대와 쌀자루를 지켜보면서 굶어죽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종자를 먹어치우지 않는 지혜가 농부와 육종학자만의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가 지구 전체에 재앙을 불러왔을 때 40년 안에 90억에 도달할 세계의 인구를 어떻게 먹일 것인가. 한 세기 전 바빌로프는 종자를 얻기 위해 노새를 끌고 파미르 고원에서 에티오피아와 아메리카를 거쳐 아마존 열대우림까지 다섯 대륙을 탐사했다. 하지만 현대의 바빌로프는 북극 영구동토에 세계의 모든 종자를 안전하게 지킬 저장고를 만들었다.
세계작물다양성트러스트(GCDT)는 노르웨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8년 2월 26일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스피츠베르겐 섬에 스발바르 세계종자저장고를 건설했다. 저장고는 영구동토 밑 암반을 130미터 깊이로 뚫은 지하동굴에 길이 120미터, 면적 270제곱미터의 3개로 분리된 방으로 이뤄져 있다. 바깥 날씨도 늘 영하이지만 저장고는 그보다 찬 영하 18도로 유지된다.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해도 끄떡없는 위치에 자리 잡았고, 4중 잠금문에다 기밀식 출입구와 공기 차단 문이 2중으로 설치돼 웬만한 외부 충격에도 안전하도록 설계돼 있다. 차고 건조한 저장고 안에 종자를 보관하면 보리는 2,000년, 밀은 1,700년, 사탕수수는 2만 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한 상태로 간직할 수 있다. 900만 달러나 들여 이런 저장고를 만든 이유는 인류 생존을 위한 최후의 안전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세계에는 종자은행 또는 유전자은행이 약 1,400개나 있지만, 그 은행들도 가장 귀중한 종자는 스발바르 저장고에 맡긴다. 최악의 사태로 자국의 종자은행이 못쓰게 될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농촌진흥청이 노르웨이 정부 및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종자기탁협정서를 체결해 종자 가치가 뛰어난 보리, 콩, 벼, 조, 수수 등 국내 작물 1만 3,000여 점을 이곳에 맡겼다. 이 저장고엔 이미 수백만 점의 종자가 보관돼 있으며 저장능력은 20억 점에 이른다.
또한 세계작물다양성트러스트는 영국 큐 왕립식물원과 함께 세계 주요 농작물의 야생종을 확보하는 야심적인 사업에 착수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세계적으로 중요한 23종의 식량작물, 곧 알팔파, 서아프리카 밤바라땅콩, 바나나, 보리, 콩, 귀리, 감자, 벼, 사탕수수, 해바라기, 고구마, 밀 등의 야생 근연종을 찾는 것이다. 확보한 종자는 스발바르 저장고를 비롯한 여러 종자은행에 보관되고, 유전자 물질과 정보는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사업 출범 비용 5,000만 달러는 노르웨이 정부가 댔다.
왜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야생작물을 찾는 데 많은 돈을 쓰는 걸까. 세계작물다양성트러스트 케리 파울러(Cary Fowler) 사무총장은 “기후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달라진 기후환경에 적응해 자라는 작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과거 달랐던 기후에서도 살았던 야생종에서 가장 적합한 후보를 찾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쌀은 개화기 온도에 매우 예민하다. 개화기에 온도가 1도만 떨어져도 수확량이 10퍼센트 줄어든다. 기후변화에 따라 이보다 심한 온도변화가 일어난다면 수확량에는 엄청난 타격이 올 것이다. 하지만 만일 야생 벼 가운데 온도가 낮은 밤에 꽃이 피는 종이 있다면 이 문제에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야생작물 탐색 작업은 기후변화와의 경주이다. 머뭇거리다간 야생종들은 영영 사라질지 모른다. 야생종이 주로 사는 개도국의 농촌은 급속한 개발로 자생지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야생종에서 유용한 형질을 뽑아내 농작물로 육종하려면 적어도 7~10년이 걸린다. 그런데 현재의 기후변화 속도로 볼 때, 지금 당장 준비해 달라진 기후에 적응하는 농작물을 길러내지 않는다면 인류는 식량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줄무늬잎마름병을 이기고 쌀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높인 새 품종 벼인 통일벼에는 인도에서 자라는 야생 벼의 형질이 들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2013)
/ 2020.12.05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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