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화산 봉수대 (開花山 烽燧臺)
삶의 보금자리를 이곳 방화동으로 옮긴 후 오늘 두번째로 개화산을 찾아 둘레길을 걸었다. 오늘은 지난 산책길에서 스쳐지나간 개화산 봉수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개화산 정상에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봉수대가 아랫쪽에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원래 봉수대가 있었던 곳은 개화산(128m) 정상 현재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설치된 봉수대는 모형이라고 한다. 남산에 있는 봉수대처럼 원형을 살려 잘 복원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봉수대 옆 안내판에는 봉수대에 관해 이렇게 적혀 있다. 남해안에 왜구가 쳐들어오면 전남 순천에서 봉화가 시작되어 서해안과 강화도를 거쳐 김포에 봉화가 오르고 그것을 받아 이곳 개화산에서 남산(목멱산) 제5봉수대로 신호를 보냈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시행되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는데 전화 등 근대적인 통신수단의 발달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폐지되었다고 한다.
봉수대는 전근대의 대표적인 통신 수단으로, 특히 적군의 침략 등 위급 상황시 그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 설치되었던 구조물이다. 봉수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려 의종 때에 전국적으로 봉수 체계가 확립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여 소식을 알렸으며, 전국의 모든 봉수는 서울의 남산을 중심으로 하여 연락망이 구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봉수의 수가 전국적으로 650여 개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중에서 개화산 봉수대는 동쪽으로 서울 목멱산[남산] 제5봉과, 서쪽으로는 경기도 김포현 북성산과 응하였다. 전국적인 국방 정보망 구축을 위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의 전국 봉수의 거로(炬路) 중 제5거로에 속하는 봉수로 건립되었다.
다음백과를 찾아보니 봉수대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써 변경의 급보를 중앙에 전달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의 영진에도 알려 적의 침략에 대비했던 통신 제도에 사용된 높은 산 위의 봉화 시설로서 군사통신으로만 사용되었다. 조선 세종 때 4군 6진의 개척과 더불어 확립되었으며, 경봉수에서는 변방으로부터 전달된 정보를 병조에 보고하며, 병조는 승정원에 보고하여 국왕에게 알렸다. 해상과 육상을 구별하여, 무사시에는 1개의 홰를 올리고 왜적이 해안에 나타나면 2개의 홰, 가까이 오면 3개의 홰, 우리 병선과 접전시에는 4개의 홰, 상륙할 때는 5개의 홰를 올렸다. 육지의 경우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개의 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개의 홰, 국경을 침범하면 4개의 홰,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개의 홰를 올리도록 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 제도가 도입·정착되자 폐지되었다.
네이버지식백과(두산백과)에 소개된 봉수대에 관한 설명을 발췌해 본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烽]을 피워,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였다. 봉화는 밤에 피우는 횃불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낮에 올리는 연기까지도 포함해서 흔히 ‘봉화’라 통칭하였으므로 봉수대의 이름도 봉화의 ‘봉(烽)’자를 따서 여러 가지로 불렀다.
봉수 제도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의종 때 확립되었으므로 봉수대의 시설도 그 때 확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22년(세종4)에 각 도의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1438년(세종20)에 완비하였는데, 연해나 변방에 설치된 각 ‘연변봉수’에는 목수가 쓰는 자(영조척)로 높이 25척, 둘레 70척의 봉수대를 쌓고, 그 아래에 깊이·너비 각 10척의 참호(塹壕)를 팠다. 봉수대 위에는 임시로 집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용품을 준비해 놓게 하고 봉수군(봉화군·봉졸·봉군)과 봉수군을 통솔하고 감시하는 오장(伍長:오원)이 생활하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는 목멱산봉수대(경봉수대) 사이에 설치된 ‘내지봉수’에는 연기를 올리는 봉수대는 쌓지 않고 아궁이(연조)만 쌓았으나 적이 침범하기 쉬운 곳은 봉수대를 쌓고, 맹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둘레에 담을 쌓은 곳도 있었다. 1474년(성종5)에는 모든 봉수대의 아궁이 위에는 반드시 연통을 높이 달아서 낮에 올리는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잘 보일 수 있게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전국에 650여 개의 봉수가 있었고, 봉화는 전황에 따라 5번까지 올리는 5구분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봉수마다 봉수대 5기가 있었다. 전국의 봉수는 경흥·동래·강계·의주·순천의 5개 봉수대 기점으로 하여 서울 목멱산(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의 봉수대로 집결되었는데,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강원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주 아차산(서울 강동구) 봉수대로부터, 제2봉 봉수대는 경상도에서 오는 봉수를 광주 천림산 봉수대로부터, 제3봉 봉수대는 평안·황해도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산 동봉의 봉수대로부터, 제4봉 봉수대는 평안·황해도의 해안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산 서봉의 봉수대로부터, 제5봉 봉수대는 전라·충청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천(서울 양천구) 개화산 봉수대로부터 각기 받았다.
이와 같이 전국에서 올라온 봉수의 정보는 목멱산 봉수대의 오원이 병조에 종합보고하면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1894년(고종31) 봉수제도가 현대적 전화통신체제로 바뀌어 폐지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봉수대는 지방기념물로 지정하여 각 도·시에서 보호하고 있다.
/ 2020.11.07 택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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