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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산책] 개화산 충혼탑, 미타사.. 둘레길 깊어가는 가을을 걷다 (2020.10.29)

푸레택 2020. 10. 30. 13:14






■ 개화산 미타사

미타사는 서울시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 서남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암이다. 서울의 서쪽 끝 김포평야와 행주나루 끝에 걸쳐 있는 미타사는 도심 속에 있는 사찰이면서도 평온함과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동산에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나무들과 앙증맞게 피어 있는 들꽃들, 하나같이 예쁘게만 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전쟁 때 육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격전지로 김포공항을 사수하던 육군 1000여명이 전사했으며, 그로 인해 절의 모든 당우들이 전소되는 비운을 맞이하기도 했었다.

현재 미타사의 당우는 작은 법당과 요사가 전부인 단촐한 가람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아마도 100여 년 전 창건 당시의 모습과도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다만 건물들이 현대식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미타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법당 옆 커다란 바위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미륵불입상이다.

절의 창건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이 불상은 무수한 일화를 남기고 있는데, 이야기 속에 이 미륵부처님은 하나 같이 땅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미륵경전에 의하면 미륵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가 열반에 든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니, 미륵부처님이 출현하였으니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을 듣기 위해 절을 창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 개화산 충혼탑(忠魂塔)

강서구 개화산 미타사 뒤편으로 50여 m 떨어진 잔디밭에는 호국충혼위령비가 서 있다. 개화산 충혼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비는 6·25전쟁 당시 '개화산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과 싸우다 전사한 대한민국 육군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무력도발 직후인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육군 1사단 전진부대 예하 12연대 3대대 소속 부대원들과 13, 15연대 일부 부대원 등 1100여 명이 김포비행장을 사수하기 위해 인민군과 맞서 개화산 등지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본부와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탄약과 식량 보급마저 끊긴 전진부대 1100여 명의 장병들은 개화산 골짜기로 퇴각해야 했고, 북한군의 수와 화력에 밀린 이들은 안타깝게도 37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결국 모두 전사했다. 당시 인민군은 아군으로 위장해 우리 군을 교란시켰다고 전해진다. 참혹했던 전투를 숨어서 지켜봐야 했던 개화산 자락의 내촌마을 주민들은 "개화산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나고 온 나라가 국가 재건에 몰두하면서 전쟁 초기에 치러진 개화산 전투는 세상에서 잊혀져갔다. 부대의 행방을 묻는 이는 없었고, 1사단 11·12·15연대는 잃어버린 부대로 기록에 남았을 뿐이었다. 계곡 속에 묻힌 비애는 산 사람이 아닌 죽은 넋들에 의해 호출됐다. 구전에 따르면, 수십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미타사 주지였던 송강 스님의 꿈속에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군인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스님이 동네 원로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전진부대 장병들의 전몰 내력이 드러났고, 이를 알게 된 육군 1사단의 현장 검증과 자료 조사 등을 통해 비로소 전투의 실체가 밝혀졌다. 뒤늦게 1994년 6월 28일 개화산 자락 미타사 인근에 호국충혼위령비가 세워졌고 이후 매년 6월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위령비 옆 비석에는 1100여 명의 전사자 명단을 단단히 새겨놓았다. (출처 Daum 뉴스)

/ 2020.10.29(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