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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산책] 약사사.. 개화산 둘레길 깊어가는 가을을 걷다 (2020.10.29)

푸레택 2020. 10. 30. 13:29













■ 개화산 둘레길,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 1

약사사는 개화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 경내에는 고려 후기 삼층석탑(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9호)과 석불(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이 모셔져 있어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창건되었다고 유추하고 있습니다.

1486년(성종 17년)에 완성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약사사가 주룡산에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조선 후기 작성된「양천읍지(陽川邑誌)」에 따르면 신라 때 주룡이라는 도인이 이 산에 머물렀다하여 주룡산(駐龍山)이라 이름하였고, 주룡 선생이 돌아간 후 기이한 꽃 한 송이가 피어 사람들이 개화산(開花山)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봉화를 받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開火山)으로도 불리었는데, 조선 초기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라도 순천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봉수에 전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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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년에 이르러 송인명(宋寅明)이 개화사(開花寺)에서 공부하고 재상이 되어 그 인연으로 절을 중수하였고, 순조 이후에는 약사사(藥師寺)로 개칭하였습니다. 1827년 송숙옥(宋叔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開花山藥師庵重建記)」에 의하면 ‘약사암’이라 하고 삼한고찰(三韓古刹)로 표기하였습니다. 조선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은 개화사라는 제목으로 사찰과 주변 풍경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으로 약사암은 잠시 봉은사의 말사가 되었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소속사찰입니다. 1928년에는 원표스님이 약사전을 고쳐지었고 1984년 설호스님이 다시 고쳐지었으며, 1988년 요사채와 범종각을 신축하였습니다.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은 영험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여 향화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약사사 홈페이지)

♤ 약사사 2

약사사는 서울시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암이다.겸재(謙齋)도 감탄했던 절경, 개화산 약사사(藥師寺)조선 후기의 화가로 이름 높은 겸재(謙齋) 정선(鄭?, 1676~1759)은 개화사(開花寺)란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그리고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바로 이 개화사가 지금의 약사사이다. 절의 창건은 삼한 시대 혹은 신라 시대로 전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창건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고려 시대의 유물인 석불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짐작해볼 따름이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는 별다른 역사를 찾아 볼 수 없다가 1737년(영조 13)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 의해 크게 중수된 후 송씨 가문의 원찰이 되었다. 송인명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어려서 아주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1736년에 좌의정에 오르자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절을 크게 고쳐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 때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병연(李秉淵)이 송인명에게 보낸 시를 통해 더욱 잘 알 수 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이병연과 교류하고 있던 겸재 정선은 이 시를 보고 ‘개화사’라는 그림으로 절경을 남겼던 것이다.이후 개화사는 약수암(藥水庵), 약수사(藥水寺), 약사사(藥師寺) 등으로 절의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법당에 모셔져 부처님과 매우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은 영험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여 향화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 2020.10.29(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