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 송수권, 오월이 돌아오면 신석정,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2020.04.28)

푸레택 2020. 4. 28. 22:55

 

 

 

 

 

 

 

 

 

 

●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 / 송수권

 

봄날에 날풀들 돋아오니 눈물난다

쇠뜨기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각시풀들

조선총독부 식물도감을 펼치니

구황식(救荒食)의 풀들만도 백오십여 가지다

쌀 일천만 섬을 긁어가도 끄떡 없는 민족이라고

그것이 고려인의 기질이라고

나마무라 이시이가 서문에서 점잖게 게다짝을 끌고 나온다

나는 실제로 어렸을 때 보리 등겨에 토면(土麵)국수를 말아 먹고

북어처럼 배를 내밀고 죽은 늙은이를

마을 앞 당각에 내다버린 것을 본 일이 있었다

햄이나 치이즈 버터나 인스턴트 식품이면

뭐나 줄줄이 외워대는 어린놈에게

어서 방학이나 왔으면 싶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센인바리[천인침(千人針)]*를 받으러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았듯이

나 또한 이 나라 산천을 떠돌며

어린것의 식물 표본을 도와주고 싶다.

쇠똥가리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각시풀들.

 

* 센인바리(千人針)) : 일제강점기시대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갈 때 우리 어머니들이 배조각에 천 사람의 바늘 땀을 놓아 지니고 가면 살아서 돌아 온다는 부적 같은 것

 

● 오월이 돌아오면 / 신석정

 

오월이 돌아오면

내게서는 제법 식물 내음새가 난다

 

그래도 흙에다 내버리면

푸른 싹이 사지에서 금시 돋울 법도 하고나

 

오월이 돌아오면

제발 식물성으로 변질을 하여라

 

아무리 그늘이 음산하여도

모가지서부터 푸른 싹은 밝은 방향으로 햇볕을 찾으리라

 

오월이 돌아오면

혈맥은 그대로 푸른 엽맥(葉脈)이 되어라

 

심장에는 흥근한 엽록소(葉綠素)를 지니고

하늘을 우러러 한 그루 푸른 나무로 하고 살자

 

●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 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 2020.04.2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