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민들레 최동현, 봄꽃을 보니 김시천, 살구꽃 문신 (2020.04.28)

푸레택 2020. 4. 28. 22:45

 

 

 

 

 

 

 

 

 

 

 

● 민들레 / 최동현

 

먼 산엔 아직 바람이 찬데

가느다란 햇살이 비치는

시멘트 층계 사이에

노란 꽃이 피었다.

나는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고

잠시 황홀한 생각에 잠긴다

무슨 모진 그리움들이 이렇게

고운 꽃이 되는 것일까

모진 세월 다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살아온 나를

이렇듯 정신없이 붙들고 있는 것일까

작은 꽃 이파리 하나로도, 문득

세상은 이렇게 환한데

나는 무엇을 좇아 늘 몸이 아픈가

황홀한 슬픔으로 넋을 잃고

이렇듯 햇빛 맑은 날

나는 잠시 네 곁에서 아득하구나

 

● 봄꽃을 보니 / 김시천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더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듯 어색한 미소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 살구꽃 / 문신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하게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 2020.04.2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