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당신은 누구십니까,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권경업,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2020.04.05)

푸레택 2020. 4. 5. 08:45

 

 

 

 

 

● 당신은 누구십니까 / 권경업

 

누구십니까

혹여 키 낮은 풀꽃 아닐런지요

겨우내 아린 꽃물 품어

보아줄 이 있건 없건

조그만 꽃부리 애써 여는 당신은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소리 낮추어 피는 감자난초 족도리풀

듣기에도 어색한 개불알풀 고슴도치풀

이름 한 번 불릴 일 쉽지 않은 이 땅에

말 없는 노랑제비꽃

연보라 노루귀, 꿩의바람꽃

천덕꾸러기 엉겅퀴 들꽃이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무심히 스치는 길섶, 하찮다지만

먼지만한 씨앗으로 세상에 오던 날

하늘에는 바람, 땅에는 비 내렸습니다

척박한 땅 싹 틔워 질긴 뿌리 내리라는

그 가르침

 

당신은 누구십니까

 

●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 권경업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내 삶의 소중한 한 사람이여

그대와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2020.04.0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