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강연호, 봄꽃을 보니 김시천, 살구꽃 문신 (2020.04.05)

푸레택 2020. 4. 5. 08:58

 

 

 

 

 

 

 

 

●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 강연호

 

지리산 산동마을로 산수유 사러 갔습니다

산동 마을은 바로 산수유 마을이고

그 열매로 차를 끓여 마시면 이명에 좋다던가요

어디서 흘려들은 처방을 핑계 삼았습니다만

사실은 가을빛이 이명처럼 넌출거렸기 때문입니다

이명이란, 미궁 같은 귓바퀴가 소리의 출구를 봉해버린 것이지요

내뱉지 못한 소리들이 한꺼번에 귀로 몰려

일제히 소용돌이치는 것이지요,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면서

이 소리와 저 소리가 한데 뒤섞이는 것이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이명은 이명이고 산수유는 산수유겠지만

옛날에는 마을의 처녀들이 산수유 열매를 입에 넣어

하나하나 씨앗을 발라냈다던가요

산수유, 하고 입안에서 가만가만 소리를 궁글려보면

이명이란 또한 오래전 미처 못다 한 고백 같은 것이어서

이제라도 산수유 씨앗처럼 간곡하게 뱉어낼 것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붉은 혀와 잇몸 같은 열매가 간절했답니다

어쩌면 이명이 낫는 대신, 지난봄의 노란 꽃잎마냥 눈이 환해지거나

열매처럼 붉은 목젖이 자랄 수도 있었겠지요

마을은 한창 산수유 열매를 따서 널어 말리는 중이었습니다

씨앗을 들어낸 뒤 마당이나 길바닥에 펼쳐놓은 열매들은

넌출거리는 가을빛에 쪼글쪼글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득, 장롱에 차곡차곡 개켜 넣은

철 지난 옷가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처럼 서글펐답니다

이제 돌아가면 오래전 쑥뜸 자국 같은 한숨 한번 몰아쉰 뒤

이명보다 깊이 잠들 수 있을는지요

산수유 사러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 봄꽃을 보니 / 김시천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더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듯 어색한 미소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 살구꽃 / 문신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하게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 2020.04.0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