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전야(前夜) 초소에서 안도현, 금강초롱 송수권, 순간의 평화 정세훈,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2019.07.15)

푸레택 2019. 7. 15. 19:22

 

 

 

 

 

 

 

 

 

● 전야(前夜) / 안도현

 

늦게 입대하는 친구와 둘러앉아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

소주잔에 고인 정든 시간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하는 이 겨울밤

창 밖에는 희끗희끗

삐라 같은 첫 눈이 어둠 속을 떠다니고

남들이 스물 갓 넘어 부르던 군가를

꽃 피는 서른이 다되어 불러야 할 친구여,

식탁 가득 주둔 중인 접시들이 입 모아

최후의 만찬이 아니야 아니야

그래, 때가 되면 떠나는 것

까짓껏 누구나 때가 되면

소주를 마시며 모두 버리고 가면 되는 것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버려도

버려도 끝까지 우리 몸에 남는 것은

밥과 의무, 흉터들

제각기 숨가빴던 시절들을 등뒤로 감추고

입술 쓴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돌리노라면

옷소매 밑에 드러나는 부끄러운 흰 손목이여,

얼마나 많은 치욕이 우리의 두 손목을 적시며 흘러갔는지

늦은 친구가 머리를 깎으러 간 동안

주인공 없는 슬픈 영화 장면 속에서

우리는 노래 불렀다

학기도 부르고 종남이도 부르고

감출 수 없는 흥분만 고요히 이마에 서리고

우리는 더욱 쓸쓸해서

거푸 술잔을 비운다

이 밤, 젊고 그리운 서러움은 비로소

온 사방 함박눈으로 내려 쌓이고

별리(別離)의 흐린 담배 연기 속으로 돌아와

내일이면 병정이 되기 위하여

말없이 뒷모습 보여줄 친구여,

어느 시대의 은빛 투구를 씌워줄까

두터운 방패를 쥐여줄까

우리는 목구멍에다 눈물 같은 소주를 털어넣는다

 

● 초소에서 / 안도현

 

오래도록 서 있으면 고향이 보인다

해와 달 향하여 이 땅에 처음 울며 눈뜬 뒤

오늘은 다시 예감의 푸른 속눈썹 반짝이는

우리 서럽고 팔팔한 스물 두 살이 보인다

떨리는 손끝에 몇 덩이 둥근 무덤을 얹어두고

나는 누구를 기다리며 여기 와 있나

이상하게 말 안 듣는 내 팔다리여

저 녹슨 들판에 주름을 잡으며 밀려오는 겨울 저녁이여

조금만 참으라구 조금만

삼 년 동안 잔밥내를 입술에 적시고

그저께야 떠나간 제대병들의 얼룩 무늬 입김이

흰 꽃 눈송이로 뚝뚝 떨어지고 있구나

 

잠시 졸며 서서 꾸는 꿈도 우리는 고맙지만

흐린 꿈의 포대경(砲臺鏡) 속을 들여다보면

눈발 속에서 불도저에 이마를 말리는 한반도

우리나라 곳곳에 청년들은 산찔레 열매가 되어 흩어지고

모여서 더러는 악써 군가도 부르리라

 

보아라 까마귀떼가 눈보라를 피해

죽은 사람 따라 서서히 능선을 넘어가는 것을

아직도 마주 보고 서 있을 십리 밖의 친구여

찬 두려움 한입 가득 물고 나뭇잎 틈에 숨어

서로를 기다리는 우리는

곧 서둘러 달아나야 할 젊은 도마뱀

 

이토록 오래 서 있으면

가장 멀리 있다는 죽음의 땅도 보일까

어둠이 난로 곁으로 근무 시간을 바꿀 때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들 쓸쓸한 감시의 끝에 서성이던 고향에 대해

목숨보다 단단한 총구를 매만지며

스물 두 살의 초병(哨兵), 나는

 

​● 금강초롱 / 송수권

 

금강산 비로봉 밑에만

피는 꽃인 줄 알았더니

 

큰기러기 작은 기러기 쇠기러기

큰고니 작은고니 철따라 쉬어가는

철원평야 휴전선 철책 밑에서도

희귀한 금강초롱꽃이 피었다

 

바람 불어 키를 넘어 갈대숲

마른 덩굴을 드러내면서

네다섯 예닐곱 송이씩

초파일 연등처럼 흔들리면서

떠도는 가시철망에 걸려

찢어질 듯 찢어질 듯 흔들린다

 

저 피의 능선

안개 자욱한 펀치볼 전투

1951년 8월 31일부터 21일 동안

군번도 이름도 없는 원혼이

금강산 비로봉 밑에서만

피는 꽃인 줄 알았더니

휴전선 가시철망에 걸려

우리 그리움 더하라고

금강초롱 피었다.

 

● 순간의 평화 / 정세훈

 

잔뜩 부푼 풍선이 아이의 손에 들려온다

육이오 전쟁을 치른

퇴역한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원을 평화롭게 넘실거린다

아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은 어미뿐이다

아이의 아비는 보이지 않는다

넘실거리던 아이의 풍선이 비행기 날개에 걸려

흔적도 없이 터져 산산이 흩어진다

아이는 운다

공원에 봄꽃이 만발해 있지만

비둘기 떼가 아이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지만

어미가 아이를 달래고 있지만

아이는 운다

비행기를 몰고 전쟁을 치르느라

아이 곁을 떠났던 아비

풍선을 만들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 서러운 아이의 울음을

당장 그치게 할 수 있는 그 부푼 풍선을

 

●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