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혼자 / 이생진
산에 혼자 오르다가
산에 혼자 오르는
다른 혼자를 보면
꼭 혼자인 나 같아서
한참 쳐다보다가
나도 가고 그도 간다
●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 이기철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
이 둥치 땅 위에 세우고
그 잎새 하늘에 피워 놓고도
제 모습 땅속에 감추고 있는
뿌리 같은 사람 만나면
그의 안 보이는 마음 속에
놀 같은 방 한 칸 지어
그와 하루밤 자고 싶다
●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 반칠환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