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밭한뙈기 /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느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의 메뚜기 것도 되고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김씨 / 정희성
돌을 던진다
막소주 냄새를 풍기며
김씨가 찾아와 바둑을 두면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나를 노엽게 한다
한 칸을 뛰어봐도
벌려봐도 그렇다
오늘따라 이렇게 판은 넓어
뛰어도 뛰어도
닿을 곳은 없고
어디 일자리가 없느냐고
찾아온 김씨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날은
한 집을 가지고 다투다가
말없이 서로가 눈시울만 붉히다가
돌을 던진다
취해서 돌아가는 김씨의
실한 잔등을 보면
괜시리 괜시리 노여워진다
● 처음처럼 / 신영복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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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