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치자꽃 향기를 아시나요 서지월, 치자꽃 설화 박규리, '치자꽃 설화'에 부쳐 김영숙 (2019.06.29)

푸레택 2019. 6. 29. 07:24

 

 

 

 

 

 

 

 

 

 

 

 

 

 

 

 

 

 

 

 

● 치자꽃 향기를 아시나요 / 서지월

 

치자꽃 향기가 꽃중의 으뜸이라는 것

전세계 인류 중에 아는 이 몇이나 될까

사람을 잘 만나야 복이 있다 했거늘

10년도 훨씬 전의 오랜 날 같은 지난 날

어느 날 중년의 한 여인이 이끄는 대로

대구공항 지나 불로동 꽃집에 들렀습지요

나를 기다렸다는 듯 그 여인이

처음 가리켜 보인 치자꽃

사철나무 같은 치자나무에 피어난

상아빛 치자꽃이었는데

동백꽃이라면 붉은 립스틱의

입술 같은게 연상되었겠지만

그냥 수수한 차림의 여인같이 피어난 치자꽃이라

그럴려니 하고 그 중년여인 시키는 대로

코끝 갖다대어 보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리송한 향기

프리지아 꽃향기 같기도 하고

아카시아 꽃향기 같기도 하고

라일락 꽃향기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닌 것은 아닌

부드러운 아몬드 향기도 아닌

초콜렛 같은 진한 향기도 아닌

커피향기는 더더욱 아닌

아모레화장품 화니핀 향기도 아닌

코끝 찡하게 하는 것도 아닌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중년여인은 세상에 피어난 꽃 중에

이런 향기 처음이라고

나도 세상에 피어난 꽃 중에

치자꽃 향기가 제일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교감했지만

호주머니 속에 퍼담아 올 수도

가슴속에 넣어올 수도 없었던

치자꽃 향기였다네

 

●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치자꽃 설화'에 부쳐 / 김영숙

 

사랑이 서럽기야 했겠습니까

다 영글지 못한 인연으로 만나져

내도록 눈썹 밑에 달라붙은 채

눈을 감으나 뜨나 발그림 그리고 섰는

미련이 그리움인 까닭입니다

내 전생에 어찌 살아

만나는 인연마다 골이 패이고

설익은 목탁소리에 속 울음을 묻는 것인지

아무런 답을 들려 보낼 수 없었던

업장이 서러웠던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번민은 아닙니다

안고 싶은 그 사랑을 밀어내며

힘 풀리어 매달리던 무거운 두 팔

승속을 흐르는 일주문 달빛에 젖어

좀체 떨어지지 않던 한 쪽 다리입니다

정작 서러운 것은, 법당을 서성이다

열린 법당문을 빠져나가던 경종소리 쫓아

인연하나 변변히 맺지도 못하면서

변변하지도 못한 인연하나 못 놓아

산문을 되돌리던 복 없는 영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