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졸작수필] (1) 대규모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산장터와 독립운동 유적지 일산역 전시관을 둘러보며 (2019.06.08)

푸레택 2019. 6. 8. 19:22

 

 

 

 

 

 

 

 

 

 

 

 

 

 

 

 

 

 

 

 

● (1) 대규모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산장터와 독립운동 유적지 일산역 전시관을 둘러보며

 

올해는 3.1독립운동(獨立運動)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며 또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지난 4월엔 일산 호수공원에서 펼쳐진 '고양 독립운동가의 길' 함께 걷기에 참가하였다. 오늘은 1919년 대규모의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산장터와 고양 독립운동 유적지 일산역 전시관을 찾았다. 마침 일산시장 5일장(五日場)이 서는 날이라 시장도 둘러보고 100년 전 그날의 만세운동을 떠올리며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겼다.

 

일산역 전시관 앞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일산역은 경의선의 중심역으로 고양 독립운동가들의 주요활동 지역이었다. 일본 헌병들이 검문 검색을 강화하는 수색역 이전에 위치한 일산역은 국내에서중국으로,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1919년 3월 25일 고양군 중면 일산리에서 16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튿날인 3월 26일 일산리 일산장(場)날을 맞아 500여 명이 인근에 있는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부 주민들은 일본 경찰의 가혹한 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근처 일본 가옥에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일본 헌병은 만세운동 지도자 15명을 체포했다. 또한 3월 27일 일산지역 주민 150명이 늦은 시각까지 홧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본 헌병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19명을 체포했는데 면서기도 1명 포함되어 있었다.

 

● 고양 3.1운동: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 (1)

 

일산장터와 면사무소 앞에서 펼친 만세운동

경의선의 고양시 거점인 중면 일산리에서도 역시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산지역은 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닌 곳이었다. 5일에 한 번 장이 열리는 덕분에 거사 일정을 잡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에 좋았지만, 수색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일본 헌병부대가 출동하기에도 용이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지역보다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장날 전날인 3월 25일 160여 명이 시위를 시작했는데, 중면 면장이 강경한 태도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지 말 것을 강요하며 헌병 주재소에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했다.

 

하지만 그 일이 오히려 기폭제가 돼 장날인 26일에는 500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대가 장터와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뜨겁게 외쳤다. 이들은 헌병대의 강력한 진압에 굴하지 않고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인근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만세운동은 3일째 되는 날까지 이어져 150여 명이 늦은 밤까지 횃불을 치켜들고 시위를 지속했다.

 

100년 전 시위 함성이 메아리쳤을 중면사무소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몇몇 책에는 지금의 명성운수 차고지 자리였다고 적고 있지만, 지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일산시장 앞 사거리 부근의 현 119지역대가 있는 위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구 일산역사는 현재 일산역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건물 안팎에 일산지역의 3·1만세운동을 알리는 전시물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일산역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 무장투쟁 열사들이 이동 경로로 삼은 곳이기도 했다. 만주지역에서 출발해 경의선을 타고 먼 길을 달려 온 이들은 상대적으로 일경의 검문을 피하기 용이한 일산역에 내려 조심스럽게 경성으로 잠입했던 것이다. 대표적 인물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헌병대와 맞서 치열한 총격전을 전개한 김상옥 열사를 꼽을 수 있다.

 

● 고양 3.1운동: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 (2)

 

자주·민주·인권을 향한 거대한 발자취

그렇다면 3·1만세는 실패로 끝난 운동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3·1운동의 열망과 좌절을 경험한 이들이 국경 너머 만주와 노령 등으로 건너가 독립군 단체를 형성했고, 기미독립선언문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3·1운동을 겪은 일제는 강압적 무단통치만으로는 한민족의 저항의지를 억누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형식적으로나마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실시한 것이 대표적 예다. 그 결과 우리민족은 교육기회의 확대와 언론·집회·결사 등 장기적 민족문화운동을 전개할 최소한의 여건을 확보하게 됐다. 또한 민족의식과 함께 민권평등사상과 공화주의와 같은 근대적 가치들이 민중들의 내면에 비로소 뿌리를 내린 것도 역시 3·1운동 덕분이다.

 

나아가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 시작된 비무장 민중운동은 중국 5·4운동을 비롯해 인도와 필리핀, 멀리는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제국 열강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에게 커다란 자극과 용기를 촉발했다. 단기적으로 철저한 실패로 보이는 사건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의 밑거름이 되는 것을 역사는 반복적으로 증명한다. 선상에서, 산위에서, 그리고 장터에서…. 고양시 곳곳에서 전개된 다양한 3·1만세운동 역시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해방된 인권을 향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발자취의 한 몫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고양신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