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졸작수필] 혜화동 보성중고(普成中高) 시절을 추억하다(2019.05.25)

푸레택 2019. 5. 25. 22:31

 

 

 

 

 

 

 

 

 

 

 

 

 

 

 

 

 

 

● 환경미화

 

새내기 중학생 시절, 교실 뒤쪽 게시판엔

세계 지도만 하나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우리들은 그것을 여백(餘白)의 미(美)라 불렀다

 

삼십(三十) 여년 세월 동안

내 교실 뒤 게시판엔 종이들이 다닥다닥

내 욕망이 빼곡빼곡, 내 부끄러움이 가득가득

자율이 없다, 여유로움이 없다

 

조금 덜 채우고 조금더 덜어낼 것을

조금더 내려놓고 마음 한 쪽 비워둘 것을

 

게시판에 내 부끄러움 빼곡히 남겨놓고

교실 유리창 너머 재잘대는 그리움 남겨두고

이제사 텅빈 마음으로 비움의 미학(美學) 깨우치며

세계 지도를 찾아, 미지(未知)의 세상으로 발길 옮긴다

 

/ 김영택 [졸작拙作]

 

● 푸니쿨리 푸니쿨라, 종례 시간의 추억

 

최근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학급 교생 선생님이 보내주신 편지다. 놀랍게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들이 종례 시간에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부르며 '가세 가세!' 후렴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구름에 솟은 삼각의 뫼의 높음이 우리 이상이요

하늘로 오는 한강의 물의 깊음이 우리 뜻이로다.

큰 일로 먼 길 나서는 우리, 차림 차림도 크거니와

인생의 힘이 끝이 없으니 기쁨에 뛰자, 보성(普成) 건아!

 

혜화동 1번지, 담쟁이덩굴 뻗어 올라가는 빨간 벽돌 건물.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학업에 매진하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은 노래를 한 곡 합창하게 한 후 종례를 마치셨다. 우리들은 목소리 가다듬어 우렁차게 4월의 노래를 부른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나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어느 가을날, 남자 선생님들과 남학생들만 있는 우리 학교에 놀랍게도 아름답고 멋진 여자 교생 선생님이 한 분 오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생 선생님이 우리 학급 담임을 맡으셨다는 것. 종례 시간이면 다른 반 친구들이 우리 학급 창가에 모여들었다.

 

햇병아리 여자 교생 선생님 혼자 들어오신 종례 시간, 그날도 우리들은 종례를 마치기 전 합창을 한 곡 했다. 우리들은 때마침 음악 시간에 배우고 있는 나폴리 민요인 '푸니쿨리 푸니쿨라'(Funiculi Funicula)를 선곡했다.

 

무서운 불을 뿜는 저기 저 산에 올라가자 올라가자

그곳은 지옥 속에 솟아 있는 곳 무서워라 무서워라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장난기 꽉 들어찬 우리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푸니쿨리 푸니쿨라의 후렴을 끝없이 반복해서 불러댔다.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모두 타는 차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노랫소리가 시간을 멈춘 채 교실 창밖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사귀를 마구 흔들어댔고 여자 교생 선생님의 얼굴은 단풍빛으로 빠알갛게 물들어 갔다.

 

내 푸르고 꿈 많던 시절, 초임(初任) 학교 종례 시간, 나도 옛 스승님 닮고 싶어서 돌아가며 자신의 애창곡을 선곡하게 하고 노래를 함께 부른 후에 종례를 마쳤다. 하얀 교복을 입은 천사 같은 아이들이 봄꽃 향기 맡으며 합창(合唱)을 한다. 맑디 맑은 물 흘러가는 소리,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로.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교실 창밖 봉긋한 목련꽃들 교실 안 기웃거리고 살구꽃잎 하나둘 노래소리 타고 머얼리 흩어진다. 이제 까르르 웃던 아이들 웃음소리 교실에 남겨두고, 유리창 너머 재잘대는 그리움 남겨두고 교단을 떠나왔다. 꿈꾸던 청춘, 꿈 많던 시절은 세월과 함께 흘러갔다.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목련꽃 살구꽃 하얗게 부서지는 봄날이 오면 내 망막엔 해맑은 얼굴, 하얀 교복 입은 천사들 반짝이는 별들의 합창 소리 봄꽃 되어 알알이 맺힌다. 은행나무 잎새 카로틴 물들어 뚝뚝 떨어지는 가을날이면 내 귓가엔 까만 교복 까만 모자 쓴 까까머리 친구들이 부르는 노랫소리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모두 타는 차 푸니쿨리 푸니쿨라

나폴리 민요 노랫소리 낙엽 되어 나풀거리며 아련히 들려온다. 이제 칠순이 넘으셨을 이명자(李明子) 교생 선생님은 그날 우리들의 노랫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까?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신 후 박목월 선생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하신 것 같다. 멋진 시(詩)를 많이 쓰셨을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다.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옴직한 사연 하나를 우리 보성고 1학년 5반 학생들은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그대로 옮겨본다.

 

김영택에게 (뜻하지 않게 어쩌다 학급 대표)

그간도 안녕하였는지?

21일 간이라는 짧은 時間을 普成에서 보내는 동안

1學年 5班에 몹시도 情을 느꼈지만 실상

아무 것도 전한 것이 없어 섭섭하기만 하구나.

오늘은 벌써 11月의 카렌다를 바꾸어야 하는 날이다.

늦게나마 띄워보는 消息을 이해해 주기 바래.

 

지금

감빛 저녁이 내리는 時間

너희들 午後의 窓으로도 차운 공기가 스미겠지?

마침 내 방엔 '후니쿨라'의 울진 노래가 가득 찼다.

꼭 '너'들의 음성처럼 몇 번이고 계속 '가자!'가

되풀이되는 듯 싶다.

 

行事로 바쁘던 거기도 이제쯤은 몹시 조용하겠지?

모두들 공부에 열중해졌겠지?

담임 선생님께서도 여전히 카메라를 메고 다니시는지?

그럼 늘 곱고, 슬기롭고, 용기있는 너희들이길

손모아 빌며...

안녕을 우리의 것으로 하자.

 

1968年 11月 1日 이명자(李明子) 글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진다. 오늘도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그 봄날은 간다. 인생의 봄날은 간다. 화려한 청춘의 봄날은 가고 없지만 그 잔향은 여전히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장맛비 내리는 이 저녁 또다시 피어오른다.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다.

 

/ 김영택 [졸작수필] 2019.07.11

 

☆ 회상(回想),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은?

 

에들먼의 말대로 기억이란 단순히 어떤 사실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범주를 자신의 가치관과 관점에 따라 새로이 재구성하고 상상하고 자신의 취향에 끼워 맞추어 재창조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 올리버 색스 '색맹의 섬'에서

 

● 푸니쿨리 푸니쿨라 (Funiculi Funicula) / 나폴리 민요

 

무서운 불 뿜는 곳 저기 저 산에

올라 가자 올라 가자

그곳은 지옥 속이 솟아있는 곳

무서워라 무서워라

산으로 올라가는 수레 타고

모두 가네 모두 가네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모두 타는 차 푸니쿨리 푸니쿨라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모두 타는 차 푸니쿨리 푸니쿨라

 

● 4월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순애 곡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 멀리 떠나와 이름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없는 무지개 계절아

 

● 별 / 이병기 시, 이수인 곡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홍순태(洪淳泰) 선생님: 양복을 매일 갈아 입으시는 멋쟁이 선생님, 그래서 별명이 칠면조였다. 보성고(普成高) 1학년 5반 담임을 맡으셨다. 서울 상대를 나오셨으며 상업 과목을 담당하셨다. 사진작가로서 당시 국전(國展) 사진 분야에 특선을 하셨고 몇 년 후 보성고를 떠나 신구전문대 사진학과 교수로 가셨다.

 

* 이명자(李明子) 교생 선생님: 가을 어느 날 남자 선생님들과 남학생들만 있는 우리 普成高에 여자 교생 선생님이 오셨다. 그분이 우리 학급을 담당하셨다. 고려대 국문과를 나오시고 시인으로 등단하셨다.

 

* 푸니쿨리-푸니쿨라(Funiculi Funicula): 이탈리아의 덴차(Denza, L.)가 1880년에 작곡한 나폴리 민요. 베수비오 산의 등산 철도를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곡으로 '케이블카를 타고'라는 뜻이라고 한다.

 

* 박일환 음악 선생님: 이탈리아 테너 가수 질리(Beniamino Gigli/1890~1957)를 좋아하셔서 스스로를 '질리', '박질리'라고 하셨다. 음악 시간이면 우리들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이태리 민요 '오 솔레미오'(O sole mio, 나의 태양)를 자주 불러주셨고, 우리들에게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가르쳐 주셨다.

 

* 이철 담임 선생님: 혜화동 시절, 보성중학교 1학년 8반 담임을 맡으셨다. 과학(물상) 과목을 담당하셨는데 키도 크시고 성격도 서글서글하시고 인상도 좋으셔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셨다. 키가 크시고 마르셔서 우리들은 선생님께 '전봇대'라는 별명을 지어드렸다. 고향이 평안도인가 이북이었다. 수업 시간에 피난 내려오신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는데 우리들이 '또 이야기해 주세요!' 하면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하시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셨다.

 

우리가 중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셨다. 고등학교에 막 진학한 1학년 때 점심 시간이었던가? 선생님께서 우리 학교에 들르셨다. '이철 선생님!' 하고 달려가서 인사를 꾸벅 하였더니 나를 알아보시고는 환히 웃으시며 '그래, 공부 잘 하고 있지?' 하시며 반겨주셨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이셨던 이철 선생님은 보성중·고등학교 6년 간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 중 내게 가장 인상깊고 멋진 선생님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 보성(普成)의 선구자적 교육 정책

 

머리를 빡빡 밀지 않고 명찰을 달지 않았던 보성

 

내가 보성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다른 학교 학생들과 달리 우리들은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깎았다. 아마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성중(普成中)과 보성고(普成高)가 머리를 빡빡 깎지 않는 학교였을 것이다. 그만큼 진보적이고 시대를 앞서간 학교이다.

 

그리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교복에 이름표(명찰)를 달지 않았다. 학생들을 믿고 자율을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였다. 선생님들이 우리들 이름을 쉽게 기억할 수 없었고, 우리들도 친구들 이름을 빨리 기억하지 못해 학년 초에는 이름 대신 번호를 부르곤 했다. 그러나 곧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여 불러주었고 명찰이 없어 불편한 점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의 책임(責任)과 자율(自律)을 존중하는 이러한 보성의 선구자적 교육 정책은 보성의 3.1 독립 운동 정신과 함께 길이 회자(膾炙)되고 빛날 것이다.

 

사족(蛇足): 30여 년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시대를 앞서간 보성고의 선구자적 정신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학생들이 교복에 명찰을 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교사들이 학생들의 이름을 빨리 기억할 수 있고 불러 줄 수 있다는 장점만을 생각하면서. 아마도 2019년 현재 우리나라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탈부착형 명찰을 포함하여 명찰을 달지 않는 학교는 없을 것이다. 보성고를 포함하여. 50년 전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명찰을 달지 않았다고 말하면 누가 믿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