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8> 기다림에 관하여 (daum.net)
우리는 먼 곳으로 떠난 연인을 기다리고, 관공서에서 인허가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식민지 시절에는 조국의 해방을 기다리고, 그리고 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다림은 신성한 생명을 담보로 잡는다. 기다림은 생명을 담보로 잡은 존재의 기망(欺罔)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속아준다. 그런 점에서 기다림은 존재에게 내려지는 유죄 선고다. 기다림은 자기 안에 숨은 욕망의 발가벗김이고 존재에의 불가피한 제약으로 무기력에 빠뜨리기도 한다. 기다림은 자아와 욕망하는 대상 사이에 가로놓인 균열과 비대칭성을 드러내는 존재 사건이다. 우리는 자주 기다림에 속박당하며 사는데, 이때 기다림은 존재를 절망적인 무기력에 내팽개침으로써 삶이 광대놀음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무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 시는 기다림이 욕망함의 좌초 위에서 성립되는 것임을 말한다. '너'는 오지 않는다. 욕망함의 대상인 '너'의 귀환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고, 그것이 끝없이 미루어지는 동안 기다림은 유효하다. '너'는 오지 않고, '문'은 닫힌다. 이렇듯 기다림은 타자의 부재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루하고 초조한 존재의 공회전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에 나오는 두 방랑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시골길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의 정체는 모호하다. 중요한 것은 '고도'가 아니다. 기다리는 행위 그 자체가 초점이다. 언제부터인가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시골길 위에서 기다림이란 헛발질을 하고 있는 두 방랑자의 얘기를 잠시 들어보자. "에스트라공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니냔 말이다. 블라디미르 묶여 있다고? 에스트라공 그래 묶여 있단 말이야. 블라디미르 묶여 있다니 어떻게? 에스트라공 손발이 다. 블라디미르 도대체 묶인 누가 묶고, 누구에게 묶여 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네가 말하는 그 작자에게. 블라디미르 고도에게? 고도에게 묶여 있다고? 무슨 소리야?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사이) 아직은 안 그렇다. 에스트라공 그자 이름이 고도라고? 블라디미르 그럴걸."(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그들은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데 고도가 딱히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온다는 고도는 오지 않고 낯선 소년이 나타나 오늘밤에 고도가 오지 못하며, 내일은 꼭 올 것이란 전갈을 전하고는 사라진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모호한 채 오직 한 가지 고도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만 분명하다. 그들은 무의미한 말을 주고받거나 장난하고 춤추는 것으로 기다림의 지루함을 잊고자 몸부림친다. 그들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고도'가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기괴한 지옥이다. 황량한 길 위에 서 있는 두 방랑자는 기다림이란 지옥에 빠져 있는 것이다. "에스트라공 그만 가자. 블라디미르 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사뮈엘 베케트, 앞의 책) 삶은 없고 오로지 지리멸렬한 기다림과 기다리는 시간을 인내심 깊게 견디는 일만 남아 있다. 두 방랑자에게 기다림은 오지 않는 메시아 '고도'를 향한 기도이고, 막연한 탄원이다. 기다림은 그것에서 버려짐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그것을 향한 욕망의 유예가 그 현재다. 기다림의 구원은 그것에 대한 일체의 유예 속에서만 가능하다. 기다림은 희망과 기대를 낳는다. 그래서 기다림이 곧 구원이라는 착시가 생겨나기도 한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기다림 이외의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기다림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 기다림은 부재하는 그것을 욕망함이고, 따라서 그것은 역동하는 존재의 사건이 아니라 대상과 자기 사이의 하염없는 반복 운동이며 항상 욕망함의 좌초로 끝난다.
기다림은 존재의 고갈이며 존재의 경화(硬化)다. 신라 때 사람인 박제상의 부인에 대한 설화를 보자. 박제상은 일본에 볼모로 붙잡혀간 왕족을 구하러 간다. 결국 왕의 동생을 구해 모국으로 보냈지만 그는 신라의 사람임을 고집하다가 일본에서 죽는다. 박제상의 부인은 치술령이라는 고개에 나가 남편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고 만다. 경상북도 포항에서도 비슷한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경애왕 때 소정승(蘇政丞)이 일본으로 사신으로 갔는데, 그의 부인이 산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다 죽었다. 그 뒤 그 산을 망부산이라 하고 망부사(望夫祠)라는 사당도 지었다고 한다. 왜 기다리는 자들은 돌이 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 박제상과 소정승의 아내가 보여주는 경우에서 기다림은 기다리는 대상에의 자기 증여다.
기다림에의 무한투자. 기다림은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자를 그 자리에 묶어놓는다. 어머니는 시장에 따라간 어린 내게 이렇게 명령하곤 했다. 어디 가지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그때 기다림의 지루함이 내 존재를 삼켜버리는 것을 느끼며 기다림이 현전에 대한 무자비한 구속이라는 사실을, 기다림이 만드는 욕망함의 패임으로 내 현전이 일그러질 것임을 번개와 같이 깨달았다. 이 하염없는 존재 퍼주기는 결국은 자기 고갈에 이르고 만다. 더 이상 기다릴 힘이 없을 때 그들은 망부석이 되고 죽음에 이른다. "그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힘이 없다. 만약 그 힘이 있다면 그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그는 이전보다 기다릴 힘을 덜 갖고 있다. 기다림이 기다릴 힘을 마모시키는 것이다. 기다림은 마모되지 않는 것이다. 기다림은 마모되지 않는 마모이다."(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철학자가 날카롭게 성찰하고 있듯이 마모되지 않는 마모, 그게 기다림이다.
메시아니즘(Messianism)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악에 물든 세계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천국을 건설하리라는 약속이 실현되기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지복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현세의 고난을 참는다. 정작 예수는 메시아라는 칭호를 거절하고 메시아니즘도 거부하였다. 기다리는 자는 지금 여기의 악과 고통을 말끔하게 씻어줄 메시아가 도래하기 전에 먼저 기다림의 무한 속에서 무엇보다도 자기를 고갈에 빠뜨린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자기를 분리하고 자기를 배제한다. 그래서 기다림은 무한한 자기의 흩어짐이다. 마침내 기다림은 그것의 주체와 그 주체가 욕망했던 기다림의 대상을 무화시키고 그 텅 빈 자리에는 "기다림 속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기다림의 불가능성일 수밖에 없는 시간의 부재가 군림한다."(모리스 블랑쇼, 앞의 책) 살아 있는 동안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다. "에스트라공 어디로 갈까? 블라디미르 멀리 갈 수 없지. 에스트라공 아냐, 아냐. 여기서 멀리 가버리자. 블라디미르 그럴 순 없다.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내일 다시 와야 할 테니까. 에스트라공 뭣하러 또 와?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리러."(사뮈엘 베케트, 앞의 책)
지금 당신도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 대신에 다만 기다림의 주체와 대상이 사라지고, 기다리는 시간들이 흘러가 부재에 이를 뿐이다. 우리 존재가 유한함에 있을 때 기다림은 시간의 무한성에도 불구하고 유한함에 종속된 것처럼 위장한다. 실은 기다림은 시간의 무한성 속에서 제 몸을 한없이 길게 늘어뜨릴 수 있다. 항상 먼저 끝나는 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기다림은 불사(不死)이고 무한이다. 그럼에도 기다림이 품격을 가지려면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을 때일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시골길 위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두 늙은 방랑자처럼 우리는 이 불모의 세상에서 어떤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가? 메시아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지 않은가?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2.03.11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박준상 옮김, 그린비, 2009
●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 현성환 옮김, 새물결, 2008
/ 2022.09.19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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