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부끄러움에 대하여

푸레택 2022. 9. 19. 20:58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58> 부끄러움에 대하여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58> 부끄러움에 대하여

[세계일보]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동주(尹東柱·1917년 12월30일∼1945년 2월16일) 시의 중요한 주제는 부끄러움이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v.daum.net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에서 멀리 달아나려는 마음의 작동
모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부끄러움과 무관하고
정말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동주(尹東柱·1917년 12월30일∼1945년 2월16일) 시의 중요한 주제는 부끄러움이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살았는데, 시인으로 살면서 많이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움에 연루되지 않기를 꿈꾸었다. 부끄러움이라는 슬픈 자의식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망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윤동주, '서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그런 사소한 것의 변화에도 괴로움을 느낄 만큼 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용에 인색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우물'과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던 것도 제 얼굴에 욕됨이 있을까 저어하는 마음에서다. 욕됨은 곧 부끄러움이 발기하는 바탕이니까.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에서 멀리 달아나려는 마음의 작동이다. 모든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윤리적으로 부끄러움과 무관하다. 차라리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이고,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이다.세계일보 자료사진

청년 윤동주는 무엇을, 왜 그토록 부끄러워했던 것일까. 청년 윤동주는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라고 썼다. 그가 부끄러웠던 것은 삶이, 그리고 제 삶이 놓인 처지가 수치스러웠고, 그 수치심이 내면적 양심으로 감당하기에 넘쳐났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자기 자신의 부조리에 대한 소환이다. 그것은 내가 나일 수밖에 없음, 혹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과 연관된다. 아울러 부조리에 대한 소환이면서 자기에게서의 달아남이다. 그렇게 우리는 타자에게 자신의 현전을 노출한다. 부끄러움은 그 노출로 인해 타자에게 나를 보여줌에서 비롯한다. 윤동주 시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부끄러움은 부끄러운 짓이 아니다.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이 부끄러운 짓이다. 부끄러움은 수줍어함으로 이루어진 모종의 가치판단이고 존재에게 내려진 나쁜 평결이다.

부끄러움의 원형은 벌거벗은 몸에 대한 자의식과 관련이 있다.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벌거벗음의 노골성 앞에서 타자의 시선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대상의 수치심을 선취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에서 멀리 달아나려는, 즉 부끄러움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마음의 작동이다. 모든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윤리적으로 부끄러움과 무관하다. 차라리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이고,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 자체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그로부터 단절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의 무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가 발가벗은 몸에서 부끄러움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가시성의 영역에서 치워버리고 싶은데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는 그 벌거벗음에 대한 수치를 느끼고, 그래서 몸을 가리는 옷을 입었다. 옷은 가릴 수 없는 것을 가리기 위해 필요한 도구다. 그들은 옷을 입음으로써 벌거벗음에서 멀리 달아날 수 있었다. 혹은 그렇게 멀리 달아날 수 있다고 믿었다.

부끄러워하는 자는 얼굴이 붉게 물든다. 홍조는 부끄러움이 부끄러워할 만한 행위들에 대한 벌주기, 곧 자기 징벌의 징후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얼굴에 떠오른 이 홍조는 자신을 타인의 시선에서 감추거나 타인에게서 멀리 달아날 수 없는 상황에서 맞딱드리는 정신의 고갈, 혹은 양심의 한계 같은 것을 드러내는 징표다. 당신은 언제 부끄러운가. 부끄러움은 감출 수 있는 것의 감출 수 없음이 일으킨 사태다. 아감벤은 부끄러움의 윤리적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프리모 레비의 경험을 참조한다. 말할 것도 없이 프리모 레비의 경험이란 인류 역사에서 전대미문으로 꼽을 만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경험이다. 프리모 레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가스실로 보내질 인원 선별 작업이 있고 난 후 그리고 지독한 폭력을 지켜보거나 묵묵히 감수해야만 했을 때면 어김없이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었던 바로 그 부끄러움이었다. 독일인들은 몰랐던 부끄러움, 의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의 범죄를 보고 느끼는 부끄러움, 그와 같은 범죄가 존재하며 그것이 결국 기존의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경험하는 부끄러움, 자신의 선한 의지는 너무도 미약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러한 의지는 자신을 지키는 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경험하는 수치심 말이다."(프리모 레비, 여기서는 아감벤, 앞의책에서 재인용)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 경험이 인간의 삶을 지탱해온 모든 윤리가 파산되어버린 상황에서의 살아남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수용소의 은어로 쓰인 '무젤만(der Muselmann)'이다. 무젤만은 '이슬람교도'라는 뜻인데, 수용소에서는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특성을 갖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걸어다니는 시체이자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는 신체적 기능들의 묶음"(아감벤, 앞의책), 달리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엄을 이미 잃어버린 '살아 있는 시체들', 혹은 식물인간과 같이 되어버린 자들이다. 부끄러움은 살아 있음에 대한 죄책감이고, 그 이면은 살아남음에 대한 찬미다. 아우슈비츠는 문화의 제약이나 왜곡 없이 삶을 벌거숭이 그 자체로 드러나게 하는 상황이다. 이때 삶의 핵심은 생물학적 삶 자체, 결국 살아남음 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살아남음은 가릴 수 없는 벌거벗음과 같은 의미였다.

아유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살아남았기 때문에, 살아남음을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음과 관련하여 아무 죄가 없다. 그럼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갈 때, 그리고 어떤 행운으로 그 죽는 자들의 대열에서 자기는 열외가 되어 살아남았을 때도 그들은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부끄러움에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스스로에게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 자신을 저버리고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감추는 것이 철저하게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아가 그 자신에게 현전한다는 참을 수 없는 사실이다. 벌거벗음이 부끄러운 것은 그것이 우리 존재의 노골성, 궁극적 친밀함(intimacy)의 노골성일 때이다. 그리고 우리 몸의 벌거벗음은 정신에 대립하는 어떤 신체적인 것의 벌거벗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의 벌거벗음, 너무나도 충실한, 너무나도 확실한 벌거벗음, 드러남이 가장 잔인한 벌거벗음, 그래서 도무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벌거벗음이다."(레비나스, 여기서는 조르조 아감벤, 앞의책에서 재인용)

부끄러움은 신체의 벌거벗음이 아니라 전 존재의 벌거벗음, 즉 가려지지 않는 노골성에서 비롯한다. 레비나스는 그것을 확실한 벌거벗음, 가장 잔인한 벌거벗음, 의식되지 않을 수 없는 벌거벗음이라고 적는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의식이 바로 그런 벌거벗음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신체, 그들의 본성, 그들의 존재는 어떤 문화의 가림막이나 왜곡 없이, 말 그대로 노골적으로 노출되어 버린 상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아우슈비츠는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의 커다란 수치다. 아우슈비츠는 "끝없이 파괴될 수 있는 파괴될 수 없는 것"(블랑쇼), 즉 인류의 내면에 부끄러움이라는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 문제는 아우슈비츠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쓸 수 있는가라고 철학자들은 물었다. 아시다시피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는 계속 씌어졌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이후에 모든 윤리학은 그것에 갇히고 말았다. 문제는 "그것(아우슈비츠)은 사실 한 번도 중단된 적 없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항상 이미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아우슈비츠는 극악이 아니라 평범하고 진부한 악들에 의해 꾸려진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진부한 악들이 저질러지는 세상에서 나는 살아 있다. 살아서 설렁탕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람들과 만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살고 있나? 때때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 살아 있음이 부끄럽다. 오랜만에 만난 벗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나는 문득 내 삶의 초라함에 진저리를 치며 부끄러워한다. 자다가 목이 말라 문득 깨어난 한밤중 내 삶의 한가운데 들어앉은 공허와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부끄러워한다. 어쩌면 공허는 인생의 본질 일부일 수도 있을 텐데, 나는 공허가 부끄럽다. 부끄러움은 자기를 돌아봄에서 나온다. 부끄러움은 단순히 우리 존재의 불완전성이나 모자람을 의식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감정이 아니다. 말하자면 부끄러움은 자기 자신을 향해 내리는 일종의 유죄선고다. 나의 살아 있음은 내 삶의 핵심이다. 때때로 부끄럽지만 나는 살아 있다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2.07.15


/ 2022.09.19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