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화가 박영의 귀촌일기(9)두려움은 창조를 위한 시발점이다: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나란 존재를 까부셔야 한다. 두려움은 창조를 위한 시발점이다. 그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 있기에 극도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다. 캔버스 앞에 선 나 자신은 무능하기 이를 데 없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여정은 아침을 여는데 필요하다. 순조롭게 일이 잘 풀린다고 까불지 말자.
이곳 시골에서는 80대가 대다수다. 대부분이 할아버지는 먼저 가시고 할머니들이 덩그란 집을 지킨다. 앞으로 10년 후면 점차 빈집이 늘 것이다. 자식들과 같이 사는 가정은 드물다. 60대 후반의 부부가 몇 있는데 새까맣게 그을려 10년은 더 늙어 보인다. 농사도 기계로 짓기 때문에 잔일만 늙은 농부들이 할 뿐이다. 잔일 또한 사람이 없어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루 내 일하고 자동차로 읍내까지 태워다준다.
벌써 모내기를 한다고 논에다 물을 잔뜩 가둔다. 간척지를 막아서 논을 만든 이곳에서는 밤새껏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예전에는 염전과 바닷가의 갯벌 속에서 온갖 조개들이 지천에 깔려 아낙네들은 그걸 주어다 장에 팔았다고 한다. 고생을 많이 해서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많다.
바닷물이 밀물과 교차되는 이곳은 이름을 어성교라 한다. 지금은 자연산 장어 집을 삼대 째 하는 집이 있다. 내가 가끔 가는 고천암 또한 뱃사람이 방금 잡아온 보리숭어, 숭어는 초무침하여 먹으면 그야말로 일품이다. 아낙네들이 잡아온 낙지는 칼로 탕탕 쳐서 기름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허기가 금방 가신다. 시골이라고 가격이 싼 것은 결코 아니다. 현지에8서 먹는다는 그 기분이 나를 즐겁게 한다.
혼자 사는 일이 외롭지 않느냐고 묻는다. 난 그림을 그려서 그런지 외로움을 잘 견디는 편이다. 밤에는 내 창가에서 새들이 운다. 해거름이면 찾아와서 내 동무가 되어 준다. 길고양이 또한 처음에는 나를 낯설어 하더니 이제는 밥을 달라고 야옹, 야옹 신호를 보낸다. 나는 “야옹이 왔어?”하고 달걀 하나를 깨어 “먹어, 먹으라니까!” 하고 풀밭에 던져준다. 삽시간에 먹어치운다.
내가 처음 내사리에 왔을 때 늘 오던 붉은가슴울새는 오지 않는다. 너무 예쁜 새라서 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우빈 선생이 밭머리에서 한 마리 주워다 주었지만 일주일 키우다가 다시 본집으로 보냈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집이고 목걸이, 밥까지 읍내에 가서 샀지만 키우지 않고 주인에게 보내주었다. 나는 언제고 바람처럼 떠나고 마음이 동하면 앞 뒤 안 가리고 실행에 옮긴다. 지금은 예전에 그렸던 그림을 청산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있다.
시골에서의 생활을 매우 부지런해야 한다. 이제 막 귀촌을 해서 그런지 토마토 줄기를 붙잡아 매 주어야지, 오이 담벼락 타고 올라가라고 지주대 세워 줘야 하고, 풀은 왜 그리도 성큼 성큼 자라는지…
얼마 전에는 창고를 수리하여 그림 그리는 곳으로 만들었다. 황혼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어 난 너무 행복하다. 단 마음이 동하면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 며칠이고 밤을 새울 수 있는 것도 자는 것에 대한 걱정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니 외로울 새가 어디 있겠는가.
시골 사람은 농사를 짓고 나는 그림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하니 방법만 다르지 목적은 같은 것 같다. 다만 그들은 소산이 있지만 난 소산이 없을 뿐이다. 언제 내가 돈 벌려고 그림을 그렸나! 어쩌면 농부들 눈에는 내가 한량 같이 보일지라도 24시간 계산해 보면 노동의 시간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눈에 띄게 시골농부들이 바빠진 것 같다. 나 또한 허리띠를 졸라매고 창작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시골농부들은 오직 농사짓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책을 읽거나 문화적인 것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해 본다. 내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에도 공부하러 도시에 나가는 아이들은 한두 명 정도였다. 그들은 이제 나이 들어 할아버지가 되었다. 자연스레 고집스럽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경험을 제일인양 떠들어댄다. 돈 몇 푼 있다고 으스대지만 내 눈에는 왠지 서글퍼 보인다. 시골에 오지 않았다면 난 그럭저럭 그림이나 그리며 여생을 보냈겠지만 이제부터는 농부들의 삶에 바짝 귀를 세워야겠다.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강인한 인내력, 한 푼이라도 아껴 농토를 늘리고 트랙터를 사겠다는 생산성, 밤늦도록 일하는 근면성을 난 눈여겨보고 있다. 분명 내 그림에도 창의적인 변화가 올 것이다.
글=박영 화백(홍대 미대 서양학과, 프랑스 유학, 크리스천정신문화연구원장)ㅣ뉴스파워 2021.06.26
/ 2022.09.19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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