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2> 웃음 (daum.net)
웃음은 농담이나 조크에 대한 생리적 반응인가?… 아니다, 얼굴의 메커니즘이 아니다. 웃음은 불안과 무기력 넘어서려는 내면의 명령서 나오는 생명의 충동…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이 웃어라!
이것은 몸속 650개의 근육 중에서 231개의 근육과 206개의 뼈가 동시에 움직이게 하고, 숨을 헐떡이게 하고, 더러는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한다. 생명의 파동, 불안의 해소, 기계적 경직에서의 도피, 무위(無爲)에 대한 반동, 사회적 몸짓임에 틀림없는 것, 이것은 무엇일까. 산소공급을 두 배로 늘려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바로 웃음이다.
웃음은 농담이나 조크에 대한,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이나 전도(顚倒)에 대한 생리적 반응인가. 아니다. 웃음은 얼굴-표면의 메커니즘이 아니다. 행복하게 자라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웃음은 죽음에 속박되고 자기에게 결박된 자아의 찰나적인 균열을 보여주며, 타자를 모방하면서 타자를 받아들이려는 자아의 돌이킬 수 없는 궤적으로 나타난다. 한 신경과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유머와 조크 때문에 웃는 사례는 열 가지의 웃음 중에서 한두 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웃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사회적 신호다. 누군가 웃기 시작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동조해서 따라 웃는다. 웃음은 진화된 영장류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다. 우리는 웃음으로 타자의 얼굴 표상을 훔쳐 나 아닌 그 누군가의 얼굴 표상으로 내 얼굴을 대체한다.
"특정 집단 속의 많은 사람이 일시에 비이성적인 유사행동을 보이는 것을 '집단 히스테리(epidemic hysteria)'라고 하는데, 경련·실신·보행장애·호흡곤란 등의 신체 증상을 동반하며 흥분·황홀 상태 등 정신증상이 전파된다. 별것 아닌 이유에서라도 한 사람(發端者)이 웃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주변 인물들에게 번져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이 집단적·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것을 '웃음병(Epidemic of Laughing)'으로 부르기도 한다."(지식 e season 2)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일찍이 웃음에 대해 주목하고 그것을 연구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웃음은 인간적인 것의 산물이다. 동물에게는 웃음이 없다. 사람들이 동물을 보고 웃을 때 필경 그것은 동물에게서 사람과 유사한 표정이나 태도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체감(體感)으로서의 피로가 그렇듯이 웃음 역시 사람만의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피로도 웃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웃음은 "이웃에서 이웃으로 반응하면서 길게 가려는, 마치 산중의 천둥소리처럼 첫 폭발이 있고 나서도 울림이 이어지는 무언가"(베르그송, '웃음/창조적 진화/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다. 웃음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의 반전에서 생겨난다. 가장 흔한 예로 사람들의 예기치 않은 실수들은 웃음을 유발한다.
"거리를 달리던 사내가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는다. 만일 그가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을 생각이었다고 상상했다면 사람들은 웃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얼떨결에 앉은 것을 사람들은 아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웃음을 나오게 한 것은 그의 태도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변화 속에 본의 아닌 것이 있다는 것, 즉 실수이다. 길에 돌멩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걸음걸이를 바꾸거나 아니면 그 장애물을 피해서 지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유연함이 부족했던 탓인지, 멍청했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몸이 고집을 부린 탓인지, 사정이 다른 것을 요구하는데도 말하자면 경직이나 외부의 힘 탓으로 근육이 여전히 같은 운동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넘어진 것이고, 이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은 것이다."(베르그송, 앞의 책)
멋지게 차려입은 사내가 거리에서 돌부리에 채여 넘어진다. 이 넘어짐은 정신과 신체의 어떤 경직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웃는다. "이 경직이 바로 웃음거리이고, 웃음은 그 징벌이다."(베르그송, 앞의 책) 아울러 웃음은 "경직을 유연함으로 교정하고, 개체를 전체에 재적응시키며, 모난 것을 제거해 둥글게 하는 것"(베르그송, 앞의 책)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웃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굴욕을 당하고 쓰라린 상처를 안는다.
"웃음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교정이다. 굴욕을 주기 위한 웃음은 표적이 되는 사람에게 반드시 쓰라린 상처를 안겨준다. 사회는 웃음으로 사람이 사회에 대해서 행한 자유행동에 복수하는 것이다. 웃음에 만일 공감과 호의가 새겨져 있었다면 그 목적을 이루는 일은 없을 것이다."(베르그송, 앞의 책)
니체는 뱀에 목구멍을 물린 양치기에 관한 알쏭달쏭한 우화를 들려준다.
"정말이지 내가 그때 보았던 것, 그와 같은 것을 나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몸을 비틀고 캑캑거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찡그리고 있는 어떤 젊은 양치기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입에는 시커멓고 묵직한 뱀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내 일찍이 인간의 얼굴에서 그토록 많은 역겨움과 핏기 잃은 공포의 그림자를 본 일이 있었던가. 그는 잠을 자고 있었나. 뱀이 기어 들어가 목구멍을 꽉 문 것을 보니."(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환영과 수수께끼에 관하여')
초인이 아무리 힘껏 잡아당겨도 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초인은 양치기에게 물어뜯어라! 물어뜯어라! 외치고, 양치기는 뱀 대가리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뱀 대가리를 멀리 뱉어내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양치기나 여느 사람이 아닌, 변화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되어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지상에 그와 같이 웃어본 자는 없었으리라!"(니체, 앞의 책) 뱀에 목구멍을 물린 양치기는 누구인가. 그것은 "더없이 무겁고 검은 온갖 것"에 목구멍을 물린 곤경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들이 아닐까. 뱀은 타락한 세상이다. 뱀들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을 파고들어 목구멍을 문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목구멍을 물린 자들이다. 우리는 치욕과 추함의 구덩이에서 몸을 비틀고 캑캑거리며 뒹군다. 뱀 대가리를 물어뜯고 그것을 멀리 내던지는 법을 모르는 자들은 고통과 증오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 웃음은 곤경에서 벗어나 더 높은 존재로의 도약을 했다는 하나의 징표다. 우리는 어떻게 그 곤경에서 벗어나 "변화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 웃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니체는 정신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말한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처음 낙타가 되고, 낙타에게서 사자, 마침내 사자에게서 어린아이가 되는 정신의 변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니체, 앞의 책,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 낙타는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넌다. 굶주림과 추위, 갈증을 묵묵히 견뎌내는 낙타! 삶이라는 짐을 지고 시간을 가로질러가는 우리에 대한 은유로 이보다 더 적확한 은유는 없다. 낙타에게 인내력의 지고함, 희생의 숭고성이 없는 바는 아니나, 웃음을 찾을 수는 없다.
그 다음 단계는 사자다. 사자는 타고난 용맹성으로 자유를 쟁취하고, 자기의 오아시스를 찾아간다. 사자는 낙타와 같이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을 자아실현의 도구로 전환시키는 내적 힘을 가진 존재다. 그러나 사자에게서도 웃음은 찾을 수 없다. 존재의 가장 높은 단계는 잘 웃는 어린아이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니체, 앞의 책,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 천진난만함은 웃음의 근원이다. 그것이 어린아이들을 웃음의 천재로 만든다. 웃음이야말로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 아니던가. 어린아이는 잘 웃는 자로서 삶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
웃음은 동물들, 늑대 인간, 흡혈귀에게는 없는 특징이다. 시인 보들레르도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불신자들, 즉 저주받고 영겁의 정죄를 받았으며, 숙명적으로 귀를 찢는 듯한 웃음소리가 두드러지는 자들은 모두 웃음의 순수한 정통성 안에 있다. ……웃음은 악마적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인간적이다."(샤를 보들레르, '작품집', 2권, 171쪽, '웃음의 본질에 대해', 여기서는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파리'에서 재인용.) 웃음은, 철저하게, 사람의 사람됨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누가 우리에게서 웃음을 빼앗는가. 나쁜 정치가, 우둔하고 탐욕스러운 기업가, 먼지 한 줌만도 못한 추악한 이기주의자들이 우리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내몬다. 우리는 경계 밖으로 추방되었으나, 그 경계 밖에서도 거부된 자들이다. 현실이 난민 수용소로 변질되고, 삶이 비확정적인 존재 안에 거주할 때,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진다. 우리는 거의 죽어가는 것이다. 웃음은 불안과 무기력을 넘어서려는 내면의 명령에서 나오는 생명의 충동이다. 무엇보다도 웃음은 생명의 약동이고, 기쁨의 실현이다. 살아남기 위해, 웃어라! 충분히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이 웃어라!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베르그송, '웃음/창조적 진화/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이희영 옮김, 동서문화사, 1978
●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파리',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8
● EBS 지식채널e, '지식 e season 2', 북하우스, 2007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옮김, 청하, 1984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1.11.13
/ 2022.09.14 옮겨 적음
'[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의진의 시골편지] 리틀 포레스트 (0) | 2022.09.15 |
---|---|
[임의진의 시골편지] 당나귀 귀 (0) | 2022.09.15 |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디지털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 (0) | 2022.09.14 |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아버지로 산다는 것 (0) | 2022.09.13 |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시간 time (0) | 2022.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