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시간 time

푸레택 2022. 9. 12. 12:27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30> 시간 time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30> 시간 time

사람은 시간속에서 진화의 여정을 소화하는 '여행자들'일 뿐[세계일보]황혼에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관찰하고 시적인 서술 속에서 밤의 현존을 살려낸 '밤으로의 여행'에서 책읽기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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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시간속에서 진화의 여정을 소화하는 '여행자들'일 뿐

황혼에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관찰하고 시적인 서술 속에서 밤의 현존을 살려낸 '밤으로의 여행'에서 책읽기의 기쁨을 만끽했던 나는 같은 저자의 책 '세상의 혼―시간을 말하다'에서 명석한 수사학의 기둥들이 떠받치는 긴 회랑(回廊)을 걷는 듯한 즐거움을 맛본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보라.

"디지털 문자반은 시간이 조악한 차원에서 미세한 차원으로 미끄러져가는 스펙트럼이다. 좌측에는 움직이지 않는 시(時)가 신문 헤드라인처럼 버티고 있고, 그 다음에는 분(分)의 행렬이 근엄하게 이어지고, 그 뒤를 초(秒)가 째깍거리며 쫓아간다. 그 오른쪽에는 10분의 1초가 있는데 괴롭도록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가장 매혹적인 것은 100분의 1초이다. 녀석들은 폭포수나 광선쇼처럼 최면을 거는 것 같다. 미친 듯이 춤추는 이것들은 너무나 빠르게 휙 지나가버려 읽을 수조차 없다."(크리스토퍼 듀드니,'세상의 혼―시간을 말하다')

시간은 어디서 오며 어디로 흘러갈까

듀드니의 문장들은 노릿하고 권태로운 생의 순간들 속에서 솟구치며 사라져간 시적 각성의 시간들을 회상할 때 아름답고, 흘러간 시간과 흘러온 시간 사이에서 사실 관계를 규명할 때 명석하다. 그 아름다움과 명석함을 뒤섞고, 거기에 자연과학과 철학과 문학을 비벼서 시간에 대한 서정적 이해라는 지평을 열어갈 때 끔찍하다. 욕망하지만 내 손이 가 닿을 수 없는 매혹적인 것들!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생은 다 끔찍하다. 그는 시간의 기원, 시간의 역설, 시간이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쓰지 않는다. 다만 살아온 시간들을 직조하여 아름다운 시간들의 타피스트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는 저변들인 시간 속에서 솟구치고 공중에서 흩어지고 잘게 쪼개져 끝내 사라지는 시간들을, 아니 시간들의 기미들을 명민하게 붙잡아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우주적 추상을 뒤뜰, 사계, 이웃들과 함께 한 세상들이라는 실재 속으로 끌어내는 그의 놀라운 시적 통찰, 그리고 생동하는 문장들에 나는 거듭 놀라고 흥분하고 매혹당한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의 억류자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흐르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잘 모른다. 시간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젖과 꿀을 빨며 살면서 정작 시간의 정체는 잘 모른 채 산다.

"시간의 흐름엔 삼차원적 방향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어떻게 분기하는지, 어떻게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시간은 상하로도, 좌우로도, 동서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의 움직임 또는 움직임의 결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내가 지금까지 마음에 그려온 것들 중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듀드니, 앞의 책)

공간은 시간의 싹들이 자라나는 묘판

시간은 그것의 정체성을 따져 물을 때 그 존재를 감추며 돌연 불가사의해진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수십억의 수십억년이 이 우주 어딘가에, 절대 죽지 않는 그 무엇, 즉 내 생물학적 진화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새벽 여명과 같이 존재한다는 상상을 하면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이끌고 역동하는 것이라면 공간은 그저 텅 비고 고갈된 공허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은 움트는 싹이라면 공간은 죽음과 고갈을 전시하는 평평한 폐허다. 그러나 공간은 시간을 넘어선다."이제 시간이 지루하게 균질적인 것, 매번 똑같은 지겨운 것이 되고, 속이 찬 자궁이라는 공간성에 대조되는, 남근적인 탄도가 된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

반면에 장소라는 형태를 띤 공간은 과거에는 시간의 미덕으로만 여겨졌던 움직임과 역동성을 제 정체성으로 품는다. 아마도 사람들이 공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아인슈타인 이후일 것이다. "공간은 움직이고 이질적이고 다층적이며, 이제는 순전한 공허가 아니라 역동적인 힘으로서, 마치 유기체처럼 변화했다."(테리 이글턴, 앞의 책)

그 역동적인 힘이 가능성들에 제 젖을 물리며 그것을 기른다. 시간과 견주어서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의 미덕과 효용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서로 배타적이기보다는 서로에게 스미고 섞인다는 점에서 상호적이다. 시간은 공간을 낳아 기르고 거꾸로 공간은 그 시간의 싹들이 자라나는 묘판(苗板)이다.

시간은 아득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낮과 밤의 뒤바뀜, 계절의 변화, 가는 해와 오는 해의 반복만이 있었을 뿐이다. 시간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시간은 오랫동안 이름도 없이 태초의 무(無)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이라고 하는데 그 대부분의 세월 동안 시간은 무(無)였고, 그 무는 무무(無無)에서 흘러나왔고, 그 무무는 무무무(無無無)에서 발원하여 흘러나왔을 뿐이다. 초(秒), 분(分), 시(時), 일(日), 주(週), 월(月), 년(年)이 생겨나면서 시간은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밤하늘에 열두 번의 보름달이 떠오르면 한 해가 지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계측할 수 있는 가장 짧은 단위의 시간은 펨토초이다. 일천조분의 일초가 그것이다. 펨토초의 세계에서 사는 펨토리안의 눈으로 보자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 조각상이요, 영원히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펨토초보다 더 짧은 시간이 나타났다. 그것은 아토초이다. 아토초는 백경(10의 18승)분의 1초이다.

"당신의 평범한 날은 1440분이고, 이는 다시 8만6400초로 구성되어 있다. 한 달을 평균 30일로 잡을 때 이는 259만2200초이고, 다시 한 해를 30일이 12번 반복되는 것으로 할 때 이는 3110만4000초이다. 이제 나의 36세 생일이 다가옴에 따라 나는 실은 단지 10억8864만초를 살아온 것이다."(글렌 굴드)

아이들을 어른이 되게 하고, 모든 나무들을 자라게 하고, 익은 콩들을 발효시키고, 오래된 바위들에 이끼를 입히고, 건물들에겐 멋지고 품위 있는 과거의 광휘를 선물하는 시간은 명백하게 영장류의 것이 아니라 호모사피엔스의 발명품이다.

생명은 시간이란 음악에 맞춰추는 춤

시간은 대체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사이에 걸쳐놓은 놀라운 가설이다. 아울러 시간이란 종(種)과 종 사이의 미끄러짐이고, 종의 고리를 잇는 DNA의 세대론적 이동이며, 그리고 종의 수평적 지평선 안에서의 이주, 도약, 도망, 회귀다. "시간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 시간은 무도장인 동시에 음악이다. 움직이는 모든 것과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시간이 안무해낸 춤이다."(듀드니, 앞의 책)

나의 육체적 삶은 시간이 준 놀라운 선물이다. 시간은 그 선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때가 되면 그 선물을 회수해간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시속 10만8000㎞로 돌고 있는 생명체들이 탑승한 배다. 시간은 곧 장소이고, 거꾸로 말하자면 장소는 시간이다. 그래서 지구라는 배는 어제 있던 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로 나아간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진화의 긴 여정을 소화해내야 하는 시간여행자들이다. 지구가 은하 속을 떠가는 동안 시간은 우리의 육체적 삶을 해체해서 해조류와 균류로 만들었다가 다시 이끼, 나무, 초파리, 조개, 새로 만든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사람의 몸을 갖고 시간 속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다른 시간대에서는 이끼, 나무, 초파리, 조개, 새의 몸을 갖고 시간 속을 지나갈 것이다. 생명이란 시간의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다. 시간은 우리 세포 속의 DNA에 들어와 다양한 변주곡에 맞춰 춤을 춘다. 결국 우리 삶이란 시간의 춤일 따름이니, 시간은 위대한 안무가이자 능란한 춤꾼인 셈이다.

시간은 만물을 집어삼키고 끝내 사라져

시간은 비이성적 냉담함으로 무장한 난폭한 파괴자다. 시간이 지나간 뒤에 살아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제 일가붙이나 제자들마저 모조리 살해한다. 크로노스가 제 자식들을 먹어치우듯이.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깨어진 사랑, 죽어버린 시체들, 주춧돌만 남고 사라진 웅장한 절들, 세상의 모든 불타버린 숲들, 폐허들만 남는다. 어떤 건물들이 시간을 견디고 꿋꿋하게 서 있다면 그것은 폐허로 돌아갈 운명의 일시적인 유예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위대한 스승이긴 하지만, 불행히도 자신의 제자를 모조리 죽여 버린다"(헥토르 베를리오즈)는 말은 진실이다. 시간은 불꽃이고, 홍수다. 태우고, 휩쓸고, 부수고 지나간다. 시간의 앞자락은 시간이 살해한 것들의 피로 물들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핏빛이다. 시간은 포식자이다. 시간은 만물을 집어삼키고 끝내는 제 자신마저도 삼킨다.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아메리카' 장 보드리야르, 주은우 옮김, 산책자, 2009
● '콜로서스―아메리카 제국 흥망사' 니알 퍼거슨, 김일영·강규형 옮김, 21세기북스, 2010
● '이방인, 신, 괴물' 리처드 커니, 이지영 옮김, 개마고원, 2004

/ 2022.09.1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