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왜 타자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가?

푸레택 2022. 9. 12. 11:41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5> 왜 타자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가?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5> 왜 타자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가?

"산다는 건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된 이 세계 안에서 산다는 뜻어떤삶도 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을 닫고 살면 그곳이 바로 지옥"[세계일보]누구나 사람은 저 자신으로서 산다. 먹고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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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된 이 세계 안에서 산다는 뜻 어떤 삶도 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을 닫고 살면 그곳이 바로 지옥"

누구나 사람은 저 자신으로서 산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오로지 자기 보존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개별자에게 부여된 숭고한 의무지만 자기 보존은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과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다시 말해 사람은 낱낱으로 분리되어 '자기성'에 갇힌 섬이 아니다. 이때 '자기성'이란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자가 드러내는 '기질적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성'에 갇힌 존재면서 동시에 숱한 타자들과 연루되고 그 연관성에 놓인 맥락의 삶을 산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된 이 세계 안에서 산다는 뜻이다. 어떤 삶도 저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를 떠나 타인들과 연결됨으로써 삶은 이루어진다. 자기를 닫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을 향해 마음을 닫는다. 마치 마음을 닫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실은 마음을 닫은 게 아니라 닫은 척하고 사는 것이다. 그는 제 삶을 위해 필요한 많은 것들을 타인에게 빚지고 살면서 그것을 모른 척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누군가 땀 흘려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굶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 옷을 만들었기 때문에 헐벗지 않고, 누군가 집을 지었기 때문에 밖에서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갖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는 이 마음에서 나오는 힘이 결정한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우선 사람은 의식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의식이란 "마음, 정서, 태도, 인식, 무의식"(이영돈, '마음')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 의식이란 우산 아래 마음과 뇌가 있다. 뇌는 뉴런(neuron)이라는 신경세포와 그 신경세포의 끝을 구성하는 시냅스(synapse)로 이루어져 있고, "100억개가 넘는 신경세포 뭉치가 이끌어내는 복잡한 생존 반응"(이영돈, 앞의 책)을 이끌어낸다.


신경세포와 시냅스는 어떻게 작용하며 마음을 만들어내는가? "신경세포 하나에는 핵을 가진 세포체, 긴 것은 1m가 넘는 한 개의 축색돌기, 그리고 다른 신경세포를 향해 뻗은 1000∼10000개의 수상돌기가 있다. 외부에서 자극이 들어오면 이 자극은 전기신호가 되어 신경세포의 수상돌기로 들어오고, 이 신호는 세포체를 거쳐 축색돌기로 전달되며, 이때 축색돌기 끝에 도달한 전기신호는 시냅스를 자극해 신경전달물질을 분비시킨다. 이때 전기신호는 화학신호로 바뀌는 것이다. 이를 신경세포의 흥분이라고 한다. 신경전달물질은 다른 신경세포의 수상돌기 끝에 있는 시냅스로 전달된다. 두 시냅스는 100만분의 2㎝ 떨어져 있다. 이렇게 전달된 신경전달물질은 전기신호로 바뀌어 세포체를 거쳐 축색돌기로 가서 시냅스를 자극하면 신경전달물질이 나오고 이는 다른 신경세포의 수상돌기 시냅스로 전달돼 전기신호가 되고, 또 계속 다른 신경세포로 전달된다. 이렇게 해서 신경세포 네트워크가 형성된다."(이영돈, 앞의 책) 마음은 뇌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화학적 기능과 활동을 가리킨다. 즉 신경물질들을 주고받는 신경세포들 사이에 작동하는 감정과 정신 기능과 시냅스 간의 상호작용 일체를 뭉뚱그려 말한다.

나 아닌 타인을 향해, 세계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 어떻게?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함으로써. 주린 자와는 먹을 것을 나누고, 억울한 자가 있다면 그 억울한 사정에 귀를 기울이고, 아픈 사람과는 기꺼이 그 아픔을 나누고 보살핌을 베푸는 게 타인을 영접함이다.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그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 마음을 품어야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짐을 질 수 있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게 열린 마음이다.

"배고픔은 공간적인 의미에서 '바깥'과 구별되는 '비공간적인 바깥'을 보여주는 통로, 다시 말해 존재 저편, 존재와 다른 차원으로 초월할 수 있는 통로이다. 배고픔은 내가 마술에 걸린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 세계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타인의 배고픔에 대한 반응을 통해, 나를 벗어나 바깥으로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현상이다."(강영안, '타의 얼굴')

열린 마음이 나를 초월적 가능성으로 이끈다. 나의 필요와 욕망을 넘어서서 타자의 필요와 욕망에 반응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를 넘어선 사람됨의 증표다. 그런 까닭에 '활짝 열린 존재'가 되는 것은 선택적 윤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함, 즉 도덕적 본성에 속한다.

그런데 타인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나'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런 희생은 사람이 한뉘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생겨난다. 한 사람의 한뉘는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데, 선택이란 그것에서 "배제당하는 다른 대안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이때 포기란 곧 희생이기 때문이다. 공직자로 살려면 부당한 돈을 멀리해야 하고, 성직자로 살려면 음주 가무와 쾌락을 멀리해야 한다. 그 원칙을 거스를 때 언젠가는 반드시 동티가 난다. 희생이란 그 "본질이 코스트(cost, 비용)"이고, 그것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발생하는 '희생(forgoing)'"(윤석철, '삶의 정도')이다. 사람이 코스트 최소화 목적함수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유한한 자원(예, 물자와 에너지) 속에서 유한한 시간(예, 자기에게 주어진 수명) 속을 살아가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코스트 최소화(minimization of cost)는 사람과 자연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함수라는 것이다.

"높은 곳에 흐르는 물질은 흐르는 물처럼 계속 아래로 내려와 위치에너지(pstefntial energy)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자연이 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목적함수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를 가능한 한 모두 발산하여 에너지가 최소화된 상태에서 안정(stability)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까닭에 "에너지 최소화 상태에 도달한 자연물은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지속 가능하므로, 장기적 차원에서 가장 경제적인 것이 된다"(윤석철, 앞의책).

사람이 살아가는데 코스트 최소화의 원칙이 반드시 올바른 것만은 아니다.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작게 쓰는 단기최적이 장기최적을 훼손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이 생겨난다. 예를 들면 공짜라고 산에 나무를 모조리 베어다 땔감으로 쓰고 나면 나중에 헐벗은 산의 지반이 약해져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재산과 목숨을 잃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기업이 눈앞의 비용을 줄이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발각되어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단기최적이 장기최적을 훼손하는 경우들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나'의 희생은 곧 미래, 즉 장기 최적을 위해 단기 최적의 패러다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코스트 최소화라는 목적함수를 추구하는 것은 자연에 작동하는 섭리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거슬러 살기도 한다. 바로 자연에 없는 '이타적 마음'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타인에 의한 나의 일깨움"(강영안, 앞의 책)이라고 말한다. 이 일깨움으로 '나'는 벌떡 일어나서 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 즉 윤리의식으로 타인의 부름에 응답한다. 그렇지 않다면 생판 모르는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남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희생하는 일이나, 가난하게 살며 평생 모은 거금을 선뜻 장학금으로 내놓는 김밥할머니들의 선행을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와 너는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된다. 사람은 더불어 소통하고 살도록 태어난 존재들이다. 나와 네가 마음을 닫고 불통한다면, 그런 세계가 바로 지옥이다. 나의 행복이 너의 불행을 담보해야만 한다면 나는 타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 소규모의 끔찍한 재앙에 지나지 않는다. 재앙이 되지 않으려면, 한 시인의 어법을 빌리자면, 나는 너에게 가서 꽃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꽃이 되는 일은 타인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것의 핵심은 내 안으로 타인을 모심, 혹은 '내 안에 있는 타자'를 깨우는 일이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는 내 안에서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낸다."(강영안, 앞의 책) 타인의 일깨움에 의한 책임에 자신을 바치는 것은 "나를 '윤리적 불면'으로, 나를 타인에 의해 사로잡힌 존재로 몰아넣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타인의 일깨움은 나를 높이 세워주고 나를 고귀한 존재로 만든다."(강영안, 앞의 책) 우리가 마음을 열지 않고, 손을 잡고 나란히 걷지 않는다면, 우리는 겨울의 추위와 잿빛 하늘 아래서 저마다 신음하다가 죽을 것이다.

"쌀쌀한 도시에서/ 손을 잡고서/ 나란히 둘이서 걷는 사람만/ 언젠가 한 번은 봄을 볼 수 있으리"(라이너 마리아 릴케, '봄을 그대에게'). 타인을 위해 나를 주는 것, 즉 희생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만일 대가를 바라고 했다면 그것은 거래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윤리적 소명을 저버리는 일이며, 이것이 곧 악이다. 타인의 부름에 마음을 열고 응답하는 것이 악과 죄에서 벗어나 고귀한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다.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1.03.15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이영돈, '마음', 예담, 2006
● 박문호, '뇌 생각의 출현', 휴머니스트, 2008
● 윤석철, '삶의 정도', 위즈덤하우스, 2011
● 강영안,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 2022.09.1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