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자유연애

푸레택 2022. 9. 12. 11:35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4> 자유연애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4> 자유연애

봉건사회 족쇄에 대한 탈출구.. '모던 경성'이 보여준 최고 패션[세계일보]패션은 모더니티가 드러나는 자리이다. 패션이 심층은 정치적 무의식이고 표층은 취향으로서의 문화다. 그것은 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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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모더니티가 드러나는 자리이다. 패션이 심층은 정치적 무의식이고 표층은 취향으로서의 문화다. 그것은 얕은 차원에서 남과 다르고 싶다는 욕망, 즉 군중 속에서 '나'를 구별짓는 차이의 전략이다. 패션은 소극적으로는 자명한 죽음에서의 도주이고 적극적으로는 살아 있음의 예찬이다. 패션을 "여성을 이용한 죽음의 도발"이라고 한 발터 벤야민의 말도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자기표현이라는 맥락에서 납득할 수 있다.

패션은 현실을 앞질러간다. 패션에 대한 후각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발달해 있다. "패션은 다가올 것에 대해 예술보다 훨씬 더 항상적이며 정확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미래에 다가올 것을 감지하는 여성 집단의 비할 데 없는 후각 덕분이다."(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왜 여자들이 그토록 패션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지는 분명하다. 유행에 관한 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확실히 둔감하다.

유행은 아직 오지 않는, 곧 오고야 말 미래의 대리인으로 먼저 온다. 먼저 와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흩뿌린다. 패션은 과거를 미래로써 선취한다. 흔히 패션과 유행이 일정한 기간을 두고 복고(復古)한다고 말하는데, 그 복고는 단순한 옛것의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다. 복고는 옛것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실현하고 순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성의 스커트 길이는 짧아졌다가 길어지고, 다시 길어졌다가 짧아진다. 남성의 넥타이 폭도 넓어졌다가 좁아지고, 다시 넓어졌다가 좁아진다. 미니멈과 맥시멈 사이에서의 지치지도 않고 반복하는 진자운동! 이때 차이가 품은 것은 현재의 판타스마고리아이다. 그런 까닭에 복고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오늘의 패션으로 귀환하는 복고는 옛것의 취향을 본뜬 오늘의 취향이고 첨단에 가닿은 과거의 취향이다.

유행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중의 취향과 정조를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에게 없던 취향을 설득하고 계몽하면서 만들어낸다. 근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와 상품의 황홀경, 단발이나 양장만이 아니라 '자유연애'와 '정사' 역시 1930년대가 발명해낸 패션이다. "1910년대 중반까지는 '연애'는 물론이고 '사랑'이라는 단어도 두드러지지 않았다."(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연애는 1920년대에 나온 신상품이었다. "연애 소동과 이혼 소동이 잇따랐고, 헤어지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정사(情死)가 속출하면서"(권보드래, 앞의 책) 자유연애는 근대의 들머리에서 패션을 이끌던 여학생과 기생들 사이에서 대유행한다.

'자유연애'야말로 1930년대 '모던' 경성이 보여준 최고 패션이다. 자유연애의 대유행을 빼고는 경성의 패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때 자유연애의 이념은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사랑이다. 1933년 9월28일에 카페걸 김봉자가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하고, 이어서 김봉자의 연인이던 유부남 노병운이 한강에 투신한다. 이 정사사건은 경성을 뒤흔든다. 김봉자의 신분은 "환락의 마경이요 죄악의 원천인 종로의 거리, 찬란히 장치한 네온사인 아래 환락경이었던 엔젤 카페에서 여왕이라는 별명을 듣고, 어지러운 그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던 여급"(영화설명, '봉자의 죽음', 유일 작, 이우홍 변사, 리갈 C192A. 1934.7)이었다. 엔젤 카페 여급 김봉자가 사랑했던 노병운은 의학사이자 유부남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는데 덜컥 연애병에 걸린 것이다. 그 사랑은 현실적 제약 때문에 죽음으로써만 겨우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 사건이 크나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이들의 '순애보'는 곧바로 문예물로 각색되고, 당시 유행하던 '영화해설'이나 '정사애화'라는 형식의 음반으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팔려나갔다. "사랑은 하나랍니다. (중략) 오! 병운씨! 당신의 피와 내 피를 섞어서 다시 혈관에 넣었지요? 그 붉은 피는 영원히 이 봉자의 심장 속에 잠자고 있을 것입니다. 명예와 인격을 나 때문에 저버린 당신의 그 사랑을 속가슴에 깊이 안고 갑니다."(정사애화, '저승에 맺는 사랑', 남궁춘작, 석금성, 콜럼비아 40498A, 1934.3.)

1931년 '별건곤' 1월호에 난데없는 기사가 실린다. "몇해 전에 현해탄에서 김우진과 정사한 윤심덕은 사실 죽지를 않고 남녀가 공히 이태리 서울 로마에 가서 김은 극작, 윤은 성악연구를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사실의 진부는 김의 친제(親弟)가 이미 총독부 외사과에 수색청원을 제출하였다니까 수색의 결과를 보아야 알겠지만은 수색을 철저하게 잘만 하면 산 사람은 못 찾아도 죽은 뼈다귀는 찾겠지. 그러나 해저수색까지는 어려울 터이니 어찌할꼬." 물론 이것은 하나의 해프닝이다. 김우진과 윤심덕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비관해서 현해탄에 몸을 던진 것은 1926년 8월의 일이다. 다섯해가 지난 뒤 이런 뜬구름 잡는 식의 '소문'을 기사화할 만큼 김우진과 윤심덕의 정사 사건은 1930년대 경성인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사건이었다. 당대의 민심은 이들의 정사 사건에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들으니 남녀가 다 일본 유학생이라 한다. '부둥켜안고 정사한다'는 것이 분명히 종잇장 같은 성격을 가진 섬사람의 풍속을 배워 온 것인가 보다. 그들의 머리에서는 조선혼이란 다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매조지했다. "조선 사람의 명부에서 영원히 그들의 이름을 말살해 버리자."

어느 결에 우리의 '누이'들은 '신여성'이라는 낯선 명칭으로 호명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신여성'은 '신여자'와 호환이 가능한 용어였다. 애초에 '신여성'은 교육을 받은 근대 여성에 대한 광의의 개념이다. 그들은 근대 교육의 수혜자로서 조선 사회의 '낡은' 틀을 깨는 근대 개조의 주체로써 호명되었다. 자유와 평등의 사상을 널리 펼치며 문명화 이전의 낙후에서 허우적거리는 조선 사회의 '개조'와 봉건의 족쇄에 매인 여성 '해방'의 투사요 선구자가 그들에게 맡겨진 사회적 책무였다. 한 근대 여성잡지의 창간사는 그 점을 이렇게 밝힌다. "개조! 이것은 오천년 간, 참혹한 포탄 중에서 신음하던 인류의 부르짖음이요, 해방! 이것은 누천년 암암한 방중에 갇혀 있던 우리 여자의 부르짖음입니다. (중략) 무엇무엇 할 것 없이 통틀어 사회를 개조하여야겠습니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져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먼져 가정의 주인된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창간사」, '신여자' 창간호, 1920.3.)

이 잡지의 창간사는 '신여성'이 가정과 사회의 개조 주체로 호명되고 있음을 꼭 집어서 밝힌다. 그런 의미에서 더러는 '신여성'에 '태양의 딸'이라는 메타포를 덧씌운 담론들도 있었다. '신여성' 자신들은 교육을 통해 개화됨으로써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스스로의 권리에 대해 눈을 떴다. 그 자각은 자유연애와 결혼으로 능동화된다. 그래서 1930년대 '신여성'의 사회적 이미지에는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하는 여자라는 뜻이 짙었다. 근대 '신여성'의 담론을 살펴보면 그 하위범주에서 신여자, 모던걸, 양처라는 세 가지의 상징으로 나뉜다. 이 하위범주에서 신여자는 개조의 주체로, 모던걸은 근대/서구에의 몰의식적 모방의 주체로, 양처는 근대주의적 질서를 세우고 지키려는 강박적 주체를 드러낸다.(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이들 '신여자'에 속하는 여성들에게 낡은 풍습과 제도에서의 자유는 먼저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으로 실현되었다. 근대 모더니스 시인 이상과 결혼했던 유일한 여자인 변동림은 이 세 가지의 범주에서 '신여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개화된 근대 주체로 호명된 '신여성'들이 왜 그토록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에 몰두했을까.

그 물음에 대해 여성 사회학자 김수진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서구의 다른 어떤 관념보다도 사랑이라는 관념이 조선을 뒤흔든 이유는 그것이 구조선의 관습 및 질서와의 단절을 가장 실감나게 내포하고 있고 그만큼 갈등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여성과 연애를 둘러싼 격론이 그렇게 존속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와 '연애'가 가지는 모호성, 또는 다의성 때문이다."(김수진, 앞의책) '신여성'들은 부모가 쥐고 있는 배우자 선택의 권력을 구습과 구질서로 낙인찍고 그 권력을 이양받음으로써 연애와 결혼의 자유 주체로 거듭난다.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은 낡고 오래된 "가족―신분적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남"(김수진, 앞의책)이라는 의미에서 '신여성'들이 쟁취한 근대성의 빛나는 전리품이었지만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의 대유행의 이면에는 그늘도 없지 않았다.

불륜과 치정, 이혼과 외도의 급증은 자유연애 대유행이 낳은 그늘의 현실태이다. 당사자들은 사회적 약속과 신의를 배신하는 그 이기적 일탈행위를 자유연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자유연애는 근대 남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신흥종교'였다. 근대의 신여성들이 꿈꾸고 추구한 자유연애는 사랑의 당사자 남녀에게 가두어지는 그 무엇으로 제한되었다. 그것이 사적인 소유로 한정됨으로써 애초에 "고유하고 사적인 것을 공동적인 것으로 변형시키"(안토니오 네그리)는 에너지로 전환될 가능성은 없었다.

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1.03.01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출판, 2009

●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2003
●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조형준 옮 김, 새물결, 2006

/ 2022.09.1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