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2> 죽음-웰 다잉을 생각함 (daum.net)
늦은 오후 집 근처에 있는 삼림욕장까지 걸어간다. 활엽수들이 잎 없는 빈 가지로 서 있고, 그 아래 잔설이 희끗희끗하다. 겨울 오후의 잔광은 활엽수들이 성기게 서 있는 사이로 뻗쳐 들어와 잔설 위에서 부서진다. 가랑잎이 쌓인 곳에는 까만 고라니 배설물이 보인다. 이 한겨울에도 생명 가진 것이 먹이활동을 하며 산 흔적이다. 나는 고라니의 배설물을 한참 들여다보고 일년생 초본 식물들이 메마른 채 무너져 있는 숲속을 거닐며, 나를 꿰뚫고 지나가는 '현재'에 대한 생각에 빠져든다. "현재의 현전은 현재의 모면할 수 없음에서, 현재의 어쩔 수 없는 그 자신으로의 회귀에서, 현재의 그 자신으로부터의 분리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내가 겨울 오후의 짧은 빛이 비쳐드는 시공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꿈도 아니고 놀이도 아니다. 그건 현재라는 중력이 나를 얼어붙은 땅 위에 붙들어 고정시켰기 때문에 가능해진 삶이다. 나는 현재에서 현재에로 회귀하는 운동이다. 나는 삶으로써 생명의 지속으로서의 현재와 현재 속에 깃든 수많은 죽음을 사유한다. 나는 현재 속에 있고, '현재'와 '나'는 하나이다. 나는 겨울 숲속에서 돌연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슬픔을 느낀다. 기원이 모호한 이 슬픔이란 무엇인가? 이 막연한 슬픔의 본질은 "순간 속에서 소진되는 존재의 무한성"(레비나스, 앞의 책)일 것이다. 100세 생일을 한 달 남겨두고,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곡기를 끊고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은 스콧 니어링(1883∼1983)을 떠올린다. 그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은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죽음과 이어져 있음을 새삼 깨닫고, 스스로에게 잘 죽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과연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가? 충만한 삶을 살 것.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살 것. 균형 잡힌 인격체로서의 삶을 살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살 것. 이렇게 충분히 살고 맞는 죽음이라면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다. '장자'의 양생주에 나오는 한 우화다. 포정이 소를 잡는데, 칼 쓰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웠다. 칼이 우아하게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은나라 탕왕 때의 명곡인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처럼 들렸다. 포정이 말하기를, "소인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껍질과 살, 살과 뼈 사이에 크게 비어 있는 곳을 후려치고 크게 열려 있는 틈으로 칼을 가져갑니다. 자연의 이치에 의지하여 큰 틈새로 들이밀고 큰 구멍을 통행하여 본래의 자연을 따릅니다. 소의 몸이 가진 결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인대나 힘줄이라도 건드리는 법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중요한 관절은 손도 대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습니다만, 칼날은 숫돌에서 막 갈아낸 것처럼 잘 듭니다. 관절 사이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실상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그런 틈새에 넣으니 텅 빈 듯 넓어서 칼질은 춤을 추듯 반드시 여유로워집니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소인의 칼날은 처음 숫돌에서 갈았을 때처럼 아직도 예리한 것입니다." 포정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칼을 쓴다고 했다. 포정은 이와 같이 칼을 쓰는 기술을 익히는 데 많은 세월을 바친 끝에 마침내 완전한 경지에 올랐다. 잘 사는 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숲속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동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숲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내리고, 대기는 찬 기운을 품는다. 나는 삼림욕장에서 돌아온 뒤 서재에 들어가 책 두 권을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와 스콧 니어링이 쓴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다.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 분명한 삶의 원칙들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는 노동자와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예순두번째 생일이었던 1945년 8월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를 결정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 오늘부터 우리의 길은 갈라집니다. 당신은 세계를 파괴하고 이 세상을 고통에 빠트리는 당신의 행로를 가겠지요. 그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나는 협력과 사회정의,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기초한 사회의 건설을 돕는 일에 착수할 것입니다."(스콧 니어링, '스콧 니어링 자서전') 무엇보다도 그의 뛰어난 통찰력은 미국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드러난다. 그는 미국의 군사주의, 국내 문제이든 국제 문제이든 힘이 곧 정의라는 "폭력배들의 불문율을 지도적 원리로 채택"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고 날선 비판을 한다. 그는 미국의 풍요가 곧 끝장나리라는 것을 적어도 반세기는 앞서서 내다보았다. 미국의 파멸은 예정된 것이었다. 애초부터 미국의 이상과 목표, 제도와 정책, 그리고 시스템이 진부함과 파렴치함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스콧 니어링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미국이 나아간 반도덕과 파렴치한 행로를 거스르는 진보적 사고와 행동양식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주류 사회와의 마찰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앞장서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쓰고 연방 법정에 피고로 서고, 논문과 책들은 출판 금지를 당하고, 보수적인 언론에 의해 위험분자·과격분자로 낙인 찍혀 사회적인 냉대와 소외를 겪는다. "추악하고 방종한 방식"의 미국적 삶의 방식에 등을 돌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낸 그는 노쇠하여 도무지 회생의 기미가 엿보이지 않는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갔다. 그는 스스로 집을 짓고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는데, 농사를 지으며 그것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대신에 최소한도의 생활비를 버는 일로 만족했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현금액수를 정하고 그만큼만 환금작물을 생산하고 더 많은 시간들을 그 자신과 가족을 위해 썼다. "시골생활의 매력은 자연과 접하면서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 네 시간, 지적 활동 네 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하며 보내는 시간 네 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 생계를 위한 노동은 신분상 깨끗한 손과 말끔한 옷, 현실세계에 대한 상아탑적 무관심에 젖어 있는 교사에게서 기생생활의 때를 벗겨준다."(스콧 니어링, 앞의 책)
나날의 삶이 이어져서 한 사람의 생을 이룬다. 그러므로 나날의 삶을 어떤 일을 하면서 꾸리는가가 중요하다. 스콧 니어링은 그날마다 삶을 꾸리는 원칙으로 열한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둘째,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 셋째,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넷째, 집, 식사,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고 번잡스러움을 피하라. 다섯째, 날마다 자연과 만나고 발밑에 땅을 느껴라. 여섯째, 농장일 또는 산책과 힘든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라. 일곱째, 근심을 떨치고, 하루하루씩 살아라. 여덟째, 날마다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를 나누라. 혼자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고, 무엇인가 주고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도와라. 아홉째,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라. 할 수 있는 한 생활에서 유머를 찾아라. 열째, 모든 것에 내재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관찰하라. 열한 번째, 모든 피조물에 애정을 가져라."(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스콧 니어링은 1983년 8월6일 100세 생일을 맞고 8월 24일에 눈을 감았다. 죽음이란 존재와 현상에 일어나는 하나의 질적인 변화이다. 무엇보다도 심장의 정지, 뇌 기능의 정지라는 몸의 죽음을 통해서 사람은 죽음을 겪는다. 죽음을 통해서 '나'라고 할 수 있는 주체를 형성하는 자기동일성의 해체를 겪는다. 죽음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파괴와 해체를 통해 완성된다. '나'의 죽음은 당연히 가족과 사회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결락으로 이어진다.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을 향해 출발한다. 죽음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 일부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이렇게 적는다. "탄생이 삶이듯 죽음도 삶입니다. 드는 발도 걸음이고 내딛는 발도 걸음입니다."(타고르)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사람이 죽음과 만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먼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 있으니 죽음과 무관하고, 죽은 다음에는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니 역시 죽음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나 자신의 죽음'이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갖고 있는 경험과 의식은 모두 타인의 죽음을 통해 얻어진 것들이다.
스콧 니어링은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그의 죽음은 충분히 영예로웠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죽음을 위한 예비 조건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잘 죽음은 잘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는 충만한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네 가지의 조건을 들었다. 첫째는 생존력이다. 생존력은 건강한 신체와 그 신체의 기력을 보존함에서 나온다. 더불어 균형을 이룬 감정과 민감한 양심, 직관력, 분명한 인생관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여러 행동노선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지혜이다. 셋째는 이 선택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내 안의 잠재력이 있어야 한다. 넷째는 자연에서 체험할 수 있는 조화로운 삶에 대한 자극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감응력이다. 겨울의 숲에서 웰 다잉에 대해 생각한 오늘, 나는 충분히 잘 살았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했다. 오늘밤 나는 행복한 잠을 이룰 수 있을까? 오늘 하루는 내가 행복한 죽음에 더 다가갈수록 기여했을까? 미래에 닥칠 내 죽음은 내가 맞는 새로운 기회이자 가능성일 것이다.
밖은 이미 어둡고, 어둠을 등진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유리창에 비친 것은 꿈도 아니고 놀이도 아닌, 지금 여기, 그 속에서 현재의 현전으로 서 있는 '나'이다. 저 먼 시간 속에서 온 나는 현재의 사라짐 속에서 나 자신을 회수하여 다시 새로운 현재 속에 회귀시키는 '나'이고, 그 '나'를 딛고 다른 '나'로 나아가는 타아(他我)일 것이다. "좀 더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 다른 사람, 또는 하나의 이념과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스콧 니어링, 앞의 책)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1.02.01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스콧 니어링, '스콧 니어링 자서전', 김라합 옮김, 실천문학사, 2000
●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이석태 옮김, 보리, 1997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스콧 니어링, 앞의 책)
/ 2022.09.1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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