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38> 아버지로 산다는 것 (daum.net)
아버지는 '가정의 선장'… 가족의 희로애락 보듬는 지휘자
잘 가게, 여름이여. "서쪽 편으로 흘러가는 꽃구름 한 편"(박정만, '꽃구름 한 편')처럼 여름은 홀연 사라졌다. 도처에 가을이다. 비온 뒤 파릇하던 쑥갓과 상추들, 채소 잎사귀 뒤쪽에 숨은 달팽이, 연못을 가득 메운 노랑어리연꽃, 밤의 허공에 푸른 사파이어로 점점이 떠돌던 반딧불이도 더는 볼 수 없고, 바위라도 쪼갤 듯 맹렬히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다. 마당을 집어삼킬 듯 번성하던 잡풀의 꺾인 기세도 완연하다. 설핏한 산빛 머문 오후에 벽오동나무의 잎들이 진다. 시나브로 어둠 자욱하고, 풀벌레 소리 높아진다.
시골생활 십년이면 이골이 날 만도 한데, 초밤의 적적함에 진저리를 치곤 한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먼 나라에 있고, 집에는 팔순 노모와 나 둘뿐이다. 청국장과 구운 고등어 올린 소찬으로 노모와 저녁밥을 먹은 뒤에 내겐 이제 가정이 없구나, 하는 상념에 골똘해진다. 삼십대엔 사업에 바빴고, 사십대엔 사업 청산 뒤 빚 설거지에 정신을 놓았다. 나는 어설픈 애비였다. 어린 것들이 언제까지나 어린 것들로 남아 있을 줄만 알았다. 아이들이 떠나니 내 가정을 밝히던 행복은 금세 방전(放電)되고 말았다. 마음이 어두우니 산천이 더 어둡다. 가슴에 사무치는 것들이 많아지는 밤들이 연달아 지나간다.
가족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존재하는 공동체다. 무수히 작은 이 공동체들이 모여서 한 사회를 떠받치는 토대를 이룬다. 이즈막에 공동체의 구성원들 중에서 가장 곤경에 빠진 것은 '아버지'들로 보인다. 도대체 아버지란 어떤 존재들인가? 나는 아버지의 아들로 마흔 몇 해를 살고, 다시 남의 아버지로 서른 몇 해째를 살고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 아버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부성의 본질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결혼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는 일이 드물지는 않으나, 결혼은 일반적으로 배우자와 배타적으로 성을 독점하며 장기적인 애착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이다. 종의 번식을 위한 장기적 협력관계는 생물계에 드문 일이 아니다. 경골어류도, 조류도, 양서류도 그렇게 한다. 결혼한 남녀 사이에서 자식이 탄생하는 순간은 곧 남자가 아버지로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자식을 낳았다고 다 아버지는 아니다. 자식의 생물학적·도덕적 성장을 돕는 책무를 다해야 진짜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의 생존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아버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라 영아의 생존율은 크게 달라진다는 보고가 그 증거다.
대개 부성확신을 가진 아버지들은 자기의 자식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자식에게 집중되는 부모의 투자에 따라 자식의 장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부모의 투자는 "자식의 성장, 발달, 성숙, 건강상태, 심리적 행복"(피터 그레이·커미트 앤더슨, '아버지의 탄생')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자식과 헤어져 사는 아버지의 투자는 자식과 함께 사는 아버지의 투자에 견줘 감소한다.
지난해 막내인 딸이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림으로써 '어설픈' 아버지로서의 내 지난한 소임은 끝난 듯싶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내분비계와 뇌마저 바꿔놓는다. 예를 들면 자식의 얼굴 사진은 아버지 뇌의 감정 중추에 반응하여 활성화한다. 아울러 "자기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시상하부, 해마부, 중뇌, 전측 대상회 등 다양한 뇌의 영역에 활성화되었다."(피터 그레이·커미트 앤더슨, 앞의책) 어린 자식들은 부성확신을 가진 아버지와 연결된 감정의 끈을 잡아당겨 제게 필요한 아버지의 보살핌을 얻어낸다.
일찍이 40여 년 전에 한 시인은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의 심정을 이렇게 직설한 바 있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박목월, '가정') 그러니까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은 세상의 모든 '어설픈' 아버지들이 자식과 함께 놀아주고 자식의 얼굴을 부비고 쓰다듬는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해 사회에 지불하는 비용이다. 아버지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이라는 시는 아버지로서 산다는 것의 기쁨과 괴로움을 다 함께 보여준다.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서정주, '영산홍')는 쉬이 잊히지 않는 절구(絶句)다. 소금밭에서 종종거리는 갈매기를 보고 시인은 모든 삶에 두루 밴 쓰리고 아림을 직관으로 꿰어 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꾸린 가정은 그 쓰리고 아림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고, 덧난 상처를 치유하는 안식처다. 아버지는 세상이란 바다를 항해하는 '가정'이라는 배의 선장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선장의 권위가 예전 같지는 않다.
"여러 사회에서 사회성 및 도덕성 교육자로서의 아버지의 역할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사회적, 기술적 변화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훼손되고 있다."(피터 그레이·커미트 앤더슨, 앞의책)
현대사회의 공교육 시스템이 "사회성 및 도덕성 교육자"로서의 아버지 노릇을 대신하기도 한다. 아이의 미래와 식구의 건강을 챙기고 보살피는 일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이렇듯 가정의 행복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헌신과 희생을 담보로 한다. "빛과 따뜻함과 웃음"은 행복한 가정의 표상들이다. 허나 내 가정은 행복한데 바깥 세상이 불행하다면 그 행복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적었다.
"저녁 때면 낯선 마을에서 낮 동안 흩어졌던 사람들이 가정으로 다시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일하러 갔던 아버지는 피로하여 돌아오고, 어린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집의 출입문이 한순간 방긋이 열리며 빛과 따뜻함과 웃음을 맞아들이고 나서 다시 닫히면 밤이 왔다. 방랑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더 이상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바람은 밖에서 무엇이든 더 이상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바람은 밖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가정이여, 나는 너를 미워한다!"(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개별자의 행복은 가정의 행복과 연동되는 것이다. 밖에서 고단하고 피로했을지라도 가정으로 돌아오면 상심한 마음은 위로를 받고 몸은 힘을 얻는다. 그러나 내 가정에 깃든 "빛과 따뜻함과 웃음"에만 취해 방랑자들과 바람들을 나 몰라라 하는 태도는 어리석다. 앙드레 지드가 "가정이여,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좋은 아버지라면 "밀봉된 가정, 굳게 닫힌 문, 행복의 인색한 점유"에 머무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행복의 점유는 어떤 경우에도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 배타적으로 행복을 점유한 사람은 타인, 낯선 것, 나눔, 이타주의를 싫어한다. 제가 싫어하는 것들이 제 행복의 토대라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 탓이다. 토대가 단단하지 않다면 그 토대 위에 선 집은 위험하다.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진짜 행복이다. 쥐고 있는 게 행복이라면 너무 꽉 쥐지 마라. 행복은 움켜쥐면 사라지고, 욕심을 버리고 놓으면 머문다. 그것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것이라 그렇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하자면 아버지의 자식으로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거꾸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의 삶은 모두 아버지의 관여, 아버지의 투자, 아버지의 보살핌이 만든 결과물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들 중에는 자식과 그 자식의 어머니에게서 자원을 빼앗아가고, 그 자원을 탕진하며 사는 '기생하는' 아버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성확신이 미약하고 아버지 노릇하기에 게으른 소수의 '나쁜' 아버지들 때문에 아버지되기, 혹은 아버지로 살기의 숭고함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1.09.18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피터 그레이·커미트 앤더슨, '아버지의 탄생', 한상연 옮김, 초록물고기, 2011
● 루이지 조야, '아버지란 무엇인가?', 이은정 옮김, 르네상스, 2009
● 이병동,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예담, 2011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김화영 옮김, 2007
/ 2022.09.1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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