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디지털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

푸레택 2022. 9. 14. 11:17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0> 디지털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0> 디지털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

디지털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속도'.. 잉여의 속도는 편리함을 주는 대신 군중과 자아의 균형을 앗아가버려인터넷을 끄고 스마트폰을 놓아라디지털세상에서도 자아의 행복은 광속이 아닌 아날

v.daum.net

디지털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속도'…
잉여의 속도는 편리함을 주는 대신 군중과 자아의 균형을 앗아가버려
인터넷을 끄고 스마트폰을 놓아라
디지털세상에서도 자아의 행복은 광속이 아닌 아날로그 속도로 온다

우리는 디지털 세상으로 들어와 있다. 그 말은 우리 삶이 무수히 많은 '외부'들과 끊임없이 '접속'하고 '연결'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활방식이 디지털 맥시멀리즘(Digital Maximalism)이 펼치는 네트워크에 구속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눈을 뜨는 순간에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의 작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새 스마트폰을 마련한 내 여자친구는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내 얼굴보다 더 자주 스마트폰의 화면을 넋을 놓고 들여다본다. 내 여자친구는 내가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너머에 있는 세상과 연애하는 중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내 여자친구가 그 전보다 나를 덜 사랑해서 스마트폰의 화면에 더 자주 눈길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뇌가 새 자극에 더욱 반응하게끔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낯선 물건이나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뇌에서는 보상체계가 활성화되고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나와 뇌수를 적신다. 아마도 선사시대에 포식자들이 널린 자연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진화했을 터다. 포식자들의 위험을 빨리 감지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아울러 피식자를 빨리 포착하고 반응해야만 굶지 않을 수 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계되고 진화된 내 여자친구의 뇌가 디지털 기기에 호응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나는 내 여자친구의 스마트폰을 조금도 질투하지 않는다.

디지털의 네트워크 세상 속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음성 메시지, 포크와 프로드와 트윗, 알림과 댓글, 링크와 태그와 포스트, 사진과 동영상, 블로그와 비디오로그, 검색과 다운로드, 업로드, 파일과 폴더, 피드와 필터, 담벼락과 위젯, 태그와 태그 구름, 아이디와 비밀번호, 단축키, 팝업과 배너, 신호음과 진동."(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들이다. 디지털은 외부 세계와 더 긴밀한 연결을 만들지만, 반면에 자신의 내면에서는 멀어지게 한다. 삶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 "이제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따라 움직인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자주, 그리고 쉽게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윌리엄 파워스, 앞의 책)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우리는 디지털 군중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디지털 군중은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그럴수록 우리는 외부지향적 사고를 강요당한다.

디지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더 빠른 '속도'다. 우리는 이 속도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면서 디지털 문명인으로 진화한다. 이 잉여의 속도가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행복이지만, 우리가 받은 것은 편리함과 즐거움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삶의 핵심인 '깊이'를 잃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인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윌리엄 파워스, 앞의 책) 그들은 하루 종일 참을 수 없는 디지털의 분주함에 빠져 외부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을 쏟는다. 그런 사이에 개인의 삶에서 충분히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고, 그 시간과 함께 삶의 깊이를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진다. 뇌, 두 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창조하는 사이버 세계에서 사는 디지털 군중의 삶 속에는 깊이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깊이는 우리가 세상에 뿌리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삶의 본질이자 정수다. 깊이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맺는 관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을 풍요롭게 만든다. 또한 훌륭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자 우리가 타인의 모습에서 감탄해 마지않는 특징 혹은 자질이다."(윌리엄 파워스, 앞의 책)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우리가 얻은 것은 편리함과 즐거움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삶의 핵심인 '깊이'를 잃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삶에서 깊이를 앗아간 속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물론 속도는 우리에게 권태의 지루함을 면제해주고, 기다림의 수고가 필요 없음이라는 선물을 준다. 그러나 속도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수단에 불과한 그것이 내 정체성과 지위, 그리고 삶의 외피에 덧씌워지면서 목적으로 뒤바뀌어버렸다. 그것은 오히려 더 빠른 속도에 대한 갈망과 그 갈망으로 마음이 그르렁거리는 상태, 즉 '형이상학적 조급증'에 빠뜨린다. 디지털 맥시멀리스트로 진화한 우리에게 디지털 세상이 준 것은 편리함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를 더 창의적이고 똑똑한 방식으로 진화시키지는 않았다. 반면에 그것은 느림의 숭고함, 고요한 시간의 평화, 충만한 삶, 활력이 넘치는 건강, 세계와 나의 조화 속에서 느끼는 행복을 앗아갔다.

디지털 문명은 우리 삶에 끼어든 침입자다. 그로 인해 우리는 "군중과 자아,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 사이의 균형"(윌리엄 파워스, 앞의 책)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깊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디지털을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과 거리를 두고,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지나친 외부지향적 삶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컴퓨터를 꺼라! 휴대전화도 꺼라! 디지털 기기들과 물리적 거리를 두면 딴 세상이 보일 것이다. 디지털 세상이 조장한 거품들이 꺼지면 우리 생은 오로지 진짜 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생이 생으로 가득 찰 때 기쁘다. 생에서 생이 다 빠져나가버리면 괴롭다. 저 자신이 된 삶은 조화롭고, 자기에게 낯선 삶은 찢어진다. 우리는 이 조화와 찢김 사이에서 산다. 나뉘고, 주저하고, 불안해하며, 자주 길을 잃고, 하지만 또 다행히 가끔은 의기양양해하면서."(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디지털 맥시멀리즘이 분명 더 문명화된 삶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행복은 무관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행복이란 항상 자아의 행복이다. 이때 자아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마음의 주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물 너울이 크게 일 때 우리는 바람이 있음을 안다. 마찬가지로 욕망이 나타날 때 우리는 내 속 깊은 곳에 웅크렸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은 욕망함이라는 무의식적 돌진력이 촉발하는 시원(始原)이자, 변화무쌍한 세계에 수시로 출현하는 악과 잔인함에 대한 훌륭한 방어막이다. 부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다. 원효가 밤의 어둠 속에서 물을 달게 마셨는데, 이튿날 밝은 빛 속에서 보니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 같은 물인데, 어제의 물은 갈증을 가시게 한 단 물이고, 오늘의 물은 더럽고 구역질나는 물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이게 다 마음의 장난 때문이다. 마음은 불변하는 실재가 아니다. 항상 변화하고 유동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 이것이 붙잡은 행복이라는 것도 항상 변화하면서 유동한다. 행복은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고, 그 가능성 속에서 우리가 갖는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행복은 마음이 욕망하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뭔가를 얻는 순간 마음은 그것의 덧없음을 깨닫고 이미 다른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 마음의 욕망함은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마음의 욕망함에는 만족이란 게 없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적응', '습관화', '쾌락주의의 쳇바퀴'라고 부른다."(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 우리가 그토록 행복의 지속을 원하지만 그것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여정이 목적지보다 더 중요하며, 활동이 성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에 비춰보자면,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행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기에 돈, 물건, 쾌락, 성공, 명성, 지위 따위를 손에 쥠으로써 갖는 즐거움이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행복의 가능성이 불러일으키는 전율이다. 그 가능성의 전율 속에서 우리는 "갑자기 세계가 다시 마법을 발휘하고 자아가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것이 더 풍부해지고 낯설어지고 더 흥미로워진다. 눈은 더 명료하게 보고, 마음은 더 예리하게 생각하며, 심장은 더 강하게 느낀다 이 세 가지가 열광과 환희와 열정 속에서 통합된다."(마이클 폴리, 앞의 책)

디지털 세상에서도 행복은 디지털의 광속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속도로 온다. 그러니 인터넷을 끄고, 손에 꼭 쥐고 있는 스마트폰도 놓아라! 멈추고, 깊이 호흡하고,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감싼 세상을 돌아보라.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추구하고 거기에 집중함으로써 돌연 얻어지는 기쁨 속에서 느끼고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의 유예만이, 그러니까 행복이 전적으로 결핍된 불행과 불운만이 오로지 행복을 발견하게 한다! 행복은 그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만 얻어진다. 이게 행복에 깃든 부조리함이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행복도 부조리하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임현경 옮김,21세기북스, 2011
●  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심민화 옮김, 개마고원, 2008
●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 김병화 옮김, 에크로스, 2011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1.10.17

/ 2022.09.1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