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7) 자유죽음

푸레택 2022. 9. 7. 11:11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7〉자유죽음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7〉자유죽음

"존엄성과 자유 갖고 죽음 선택할 수 있다"1995년 11월 4일 한 남자가 파리 근교의 한 아파트 창문 밖으로 제 몸을 던진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투신자살하기 얼마 전부터 폐기능 부전으로 인공호

v.daum.net

"존엄성과 자유 갖고 죽음 선택할 수 있다"

1995년 11월 4일 한 남자가 파리 근교의 한 아파트 창문 밖으로 제 몸을 던진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투신자살하기 얼마 전부터 폐기능 부전으로 인공호흡기를 달고 침대에서 주로 누워 지냈다. 어느 날 그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 틈에 그는 인공호흡기를 떼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새처럼 허공으로 제 몸을 날렸다. 자살은 피할 수 없는 그의 불가피한 운명이었을까. 피에 불가결하게 새겨진 운명이란 "일종의 봉인된 증서"이다. 그는 삶을 접고, 반대로 운명이란 봉인된 증서를 펼친다. 거기까지가 그의 삶이었다. "유기체란 자신의 고유한 부분들을 무한하게 접는 능력과 무한하게가 아니라 그 종(種)에 부여된 전개의 정도까지만 펼치는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질 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삶이 펼침이라면 죽음은 접힘이다. "펼침은 증가함, 자라남이고, 또한 접힘도 감소함, 줄어듦, '세계의 외진 곳으로의 되돌아옴'이다."(질 들뢰즈, 앞의 책)

◇질 들뢰즈 ◇장 아메리 ◇다자이 오사무

그는 자신의 전기적 특이성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게 적었다. "여행은 별로 하지 않았고, 공산당에 가입한 적도 없었으며, 결코 현상학자나 하이데거식의 학자이지도 않았고, 마르크스를 포기하지도 않았으며, 1968년 5월혁명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질 들뢰즈는 1925년 1월 18일 파리에서 두 아이를 둔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범한 엔지니어고, 형은 독일 점령 시에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에서 죽었다. 그는 파리의 소르본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파리 제8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학에서 철학·문학·과학을 강의하고 1987년 파리 북쪽으로 생드니 지역으로 옮긴 파리 제8대학교에서 퇴임한 뒤로 일상의 좌파 활동을 이어가며 집필과 방송활동을 한다.

그가 파리 북서부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청년사회주의단체에서 활동한 뒤 대학에서 의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한 펠릭스 가타리를 만난 것은 1969년이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세미나에서 지적 토대를 쌓은 가타리는 68혁명 이후 분출하는 새로운 욕망의 물길을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반동적으로 트는 것을 본 뒤 라캉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선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한 몸으로 수렴하여 보려는 가타리와 만난 들뢰즈는 1972년에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부제가 붙은 '앙티 오이디푸스'를 내고, 이어서 1980년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 2'라는 부제를 붙인 그토록 아름다운 책 '천 개의 고원'을 펴낸다. '천 개의 고원'은 다른 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들로 넘치지만 나는 그중에서 '리좀' 개념에 매혹되었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etre)'라는 동사를 부여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들뢰즈는 생의 말년에 심각한 폐기능 부전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 고통 때문에 사람 만나는 일을 기피하고 집필 작업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슬라보예 지젝이 "현대 철학의 중심적 준거점"이라고 말할 정도로 들뢰즈는 현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우뚝 솟아난다. 푸코가 말했듯이 그라는 존재가 미스터리 그 자체이기 때문일까. 들뢰즈의 자살은 불가사의하다.

철학자들이 죽음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다. 죽음을 사유하는 것은 철학에 부과된 책무 중의 하나다. 누구보다도 죽음에 대해 끈질기게 사유한 루마니아 출신의 염세주의 철학자인 에밀 시오랑은 이렇게 썼다. "내 단 하나 유일한 관심은 죽음의 충동이었다. 나는 거기에 모든 것을, 나의 죽음까지 바쳤다."(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평생 자살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에밀 시오랑이 끝내 자살을 연기하며 자연수명을 다 누리고 죽은 것은 뜻밖의 아이러니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걸까? 자살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살해한다는 뜻이다. 왜? 삶에 대한 염증이나 실존적 구토, 혹은 냉소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죽는 것만 못한 삶이라면, '치욕스런 좌절과 냉혹한 실패' 상태에서의 인생이 더욱 추한 것이라면, 존엄성과 자유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장 아메리, '자유죽음')

살아야 될 아무 뜻도 보람도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윤리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자살은 자기 삶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고 경외감의 표현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그토록 강렬한 살려는 의지, 살아 있는 존재의 끈질긴 자기보존 충동을 떠올리면 자살은 불가사의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장 아메리는 자살이라는 용어를 '자유죽음'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자살과 자유죽음은 같은 뜻을 지시하지만 뉘앙스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자살이 자기파괴라는 폭력의 의미라는 울림이 강한 데 반해, 자유죽음은 죽음에 대한 자기선택권의 울림을 갖는다. 장 아메리는 자살자를 자유롭게 자기 죽음을 선택한 사람으로 이해했으니까 자살보다는 자유죽음이라는 대체 용어를 더 선호한 것은 당연하다.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짓은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자유죽음이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한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오로지 그 거짓이라는 성격 때문에 괴롭게 만든 것을 자유죽음은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일종의 통로, 절대자에 이르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는 모든 죽음보다 자살이 훨씬 덜 부조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장 아메리, 앞의책) 장 아메리는 바로 '자유죽음'이라는 책을 출간한 지 2년 뒤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자신의 자유죽음을 실행한다. 1978년 10월 17일이다.

이 세상에 자살한 작가나 예술가들은 흔하다. 그중에서 기억할 만한 또 한 사람의 자살자는 전후에 활동했던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1909∼1948)다. 스무 살 무렵 신구문화사판 '전후세계문제작품집'에서 '사양'을 읽은 뒤 단박에 다자이의 열광적인 독자가 되어버린 나는 '청춘의 착란'을 읽은 뒤 가슴이 먹먹해져 고층아파트 창가에 서서 어둠이 내리는 들녘을 망연히 내려다본다. 나는 작가의 "방심한 맨얼굴"을 봤다. 이때 맨얼굴은 고독과 파란과 착란으로 얼룩진 삶의 생생함과, 세상을 너무 깊이 너무 많이 보아버린 자의 비극을 증언한다. 다자이는 그 비극에 대해 "입가에 하얀 거품이 생기도록, 재잘재잘, 혼자서 떠들어"댄다.

1909년 아오모리현 쓰가루에서 대지주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지만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들을 탐독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지만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 재학 중에는 엉뚱하게도 대지주의 아들이라는 죄의식 때문에 좌익운동에 투신한다. 뼛속까지 자유주의자인 그가 좌익운동 동료들에게 이질감과 환멸을 느끼고 거기에서 빠져나온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태중에서부터 권태와 외로움에 침식당한 사람이다. 그나마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은 소설을 향한 불굴의 욕망이다.

다자이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본질에서 과거인 것, 즉 고독과 권태가 아니다. 미래의 낯섦이다. 그것 때문에 자기 소외가 일어난다. 그때마다 다자이는 자살을 향해 달려간다. 자살은 세상이라는 "악덕의 지저분한 사육장"(보들레르)과, 생의 안쪽을 착색하고 있는 권태와 외로움, 그보다는 기댈 것 없는 내일의 낯섦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혹은 세상의 모든 악덕과 위선을 향한 조롱이다. 그는 자살에 관한 여러 번의 전과(前科)가 있다. 10대 때 존경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자살 소식을 듣고 다량의 칼모틴을 먹고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스물한 살 때는 카페 여급과 자살을 기도하지만 혼자만 살아난다. 스물여섯 살 때 다시 산속에서 자살기도를 했으나 실패.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간다.

집에서 주는 생활비가 끊기자 극심한 생활고에 몰려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 삶의 비루함과 자살 충동과 자의식 과잉은 다자이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었다. 스물여덟 살 때 고교 시절부터의 애인인 게이샤 출신의 오야마 하쓰요와 결혼하지만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 아내와 함께 온천에서 칼모틴에 의한 정사(情死) 계획. 미수에 그치다.

마침내 서른아홉 살 때 장편소설 '인간실격'을 발표하고 아내에게 남기는 유서, 아이들의 장난감을 남겨놓고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 엿새 뒤 새벽에 사체 발견.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태어나 그 격동의 세월을 건너온 다자이의 자살이란 무력함에 대한 저항, 최후적인 자기도발, 졸렬과 수치에 대한 통렬한 복수다. 약물 중독, 폐결핵, 알코올 중독. 거기에 네 번의 자살 기도. 그 삶에 미지근함이란 없다. 언제나 뜨겁거나 차가울 따름이다. 뜨겁고도 차가운 사람. 바로 이 책 '청춘의 착란'은 전후의 절망 속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등대와 같은 존재였던, 그리고 나쁜 시대에 대한 절망과 염세주의에 감염돼 신음하고 자살에 생래적 매혹에 빠져들던 한 소설가의 내면을 살짝 엿보게 해준다.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0.11.23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알베르토 괄란디, '들뢰즈', 임기대 옮김, 동문선, 2004

● 질 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이찬웅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 다자이 오사무, '청춘의 착란', 박현석 옮김, 사과나무, 2010
● 장 아메리, '자유죽음', 김희상 옮김, 산책자, 2010

/ 2022.09.07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