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 <18> 불륜 adultery (daum.net)
이탈리아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소설 '비단'은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불륜'소설이다. 누에상 에르베 종쿠르와 그의 아내 엘렌이 겪은 불 같은 사랑의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저 먼 일본까지 누에알을 구하러 갔던 종쿠르가 한 일본 소녀를 보고 단박 사랑에 빠진다. 그 둘의 사랑에는 큰 위험과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아울러 종쿠르에게는 아내가 있고, 소녀에게는 주인이 있다. 고향에 돌아온 종쿠르는 소녀를 열망하고, 그 열망이 시키는 대로 구실을 만들어 일본을 찾는다. 몇 번이나. 내란에 빠진 일본을 떠나온 뒤 그는 다시는 일본을 찾지 않는다. 평화로운 삶을 살던 종쿠르는 일본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제 몸속으로 파고든 당신의 손가락. 제 입술에 닿은 당신의 혀. 당신은 제 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와요. 당신은 제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저를 들어올려요. 그리고 당신의 음경 쪽으로 서서히 제 몸을 끌어당겨요. 누가 감히 지금 이 순간을 지워버릴 수 있겠어요? 당신은 천천히 제 몸속으로 들어와요. 당신의 손은 제 얼굴을 더듬어요. 당신의 손가락이 제 입 속으로 파고들어요. 당신의 눈에서, 당신의 목소리에서 기쁨이 넘쳐나요. 당신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요. 마지막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 저도 환희 비명을 내질러요." 세월은 흘러간다. 종쿠르의 삶은 그럭저럭 평탄했다. 아내가 죽고 스물 세 해 뒤에 그도 죽는다. 소설에는 놀라운 반전(反轉)이 숨어 있다. 엘렌이 죽고 장례를 다 치른 뒤 종쿠르는 노골적인 정염을 갈구하는 그 편지, 일본 소녀가 보낸 그 편지가 실은 평생 정숙한 여자로 믿은 아내 엘렌이 써서 일본어로 옮겨 그에게 배달시켰던 것을 알게 된다. 아내가 어떻게 에로틱한 사랑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내가 자기의 불륜을 모두 알고 있었단 말인가? 혼돈에 빠진 종쿠르는 나중에야 입이 딱 벌어질 만한 비밀을 깨닫는다. 그 비밀은 '비단'을 직접 읽고 풀기 바란다.
불륜은 일부일처제 결혼을 둘러싼 통념들을 위협하고, 인류의 공인된 관습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기 때문에 비난받는다. "나는 우리 문화가 불륜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믿는다. 불륜은 '결혼은 이런 것이다'라는 통념을 위협한다는 게 그 이유다. 불륜에는 위험과 변화, 자율이 따르게 마련이다. 경험이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불륜과 맞닥뜨리면 누구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종종 모든 염려에 대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정서적 상태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루이즈 디발보, '불륜, 오리발 그리고 니체') 불륜은 관습화된 도덕의 부당성에 대한 '속물들의 저항'이라는 진부함이기 때문에 비난받는다. 대부분 그것은 사회 전복적이지 않고 그저 외설적 유희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불륜의 당사자조차도 다른 사람의 불륜은 비난하고 단죄하려고 든다. 불륜을 '도덕적으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욕망의 물꼬 터주기'로 인식하더라도 그것에 덧씌워진 나쁜 이미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불륜을 가뭄이나 전염병이나 파산과 비슷한 것에 견주어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 당사자의 사생활, 사적 감정, 고독, 한 사람으로서의 자율성, 영혼의 성장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불륜은 무조건 나쁜 것이다! 그 나쁜 것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목을 매는 것일까? 왜 그토록 많은 문학작품들은 불륜을 소재로 삼을까? 저 멀리 D.H. 로렌스의 '차탈레이 부인의 연인'에서 최근의 '비단'에 이르기까지. '불륜' 소설들은 우리 주변에 차고 넘친다. 모파상(1850∼1893)의 소설 '고인'은 이상한 방식으로 현실의 이면에 숨은 불륜을 드러낸다. 죽은 아내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묘비명이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다 잠들었노라"에서 "어느 날 불륜 관계를 맺으러 나갔다가 비를 맞아 감기에 걸려 죽었노라"라고 바뀐 것을 보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의 것은 거짓말이고 뒤의 것이 삶의 숨은 진실이다.
공직자로서 청렴하고 예술에 소양이 깊은 한 남자가 있다. 인생에서 도무지 실패나 좌절을 겪지 않고 승승장구하던 이 남자는 부적절한 '사랑'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에 난 몰라."(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남녀 간에 맺는 사랑의 핵심은 욕망이고, 그 욕망의 현실태는 애무며, 애무의 끝은 살섞음이다. 이게 다 페닐에틸아민이란 성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다. 연애 초기에 이것은 혈관으로 분비되어 설레게 하고 황홀경을 안겨준다. 방금 함께 있다가 헤어져도 그(그녀)가 보고 싶은 것은 다 이 페닐에틸아민의 장난질 때문이다. 그 남자는 단 한 번의 부적절한 사랑으로 공직과 명예와 신의를 다 잃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라면 불륜의 당사자들이 아니라 연애 감정을 전달하는 화학물질인 페닐에틸아민을 처벌하라고 했을 터다. '명심보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랑이 깊으면 낭비도 깊고, 감춘 것이 깊으면 망하는 것도 깊다." 이는 더도 덜도 아닌 불륜 드라마다. "불륜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함으로써, 우리에게 실재의 징조를 말해준다."(이택광) 불륜 드라마는 감추고 가림으로써 '실재의 징조'를 말해준다는 법칙은 이번 사건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불륜에 관한 자기고백적인 발칙한 수다를 고갱이로 하는 루이즈 디발보가 쓴 '불륜, 오리발 그리고 니체'는 불륜에 빠진 남녀들이 겪는 이상심리와 상처, 극복에 대한 문화적인 고찰을 담는다. 디발보는 "결혼 이후 나는, 한마디로 현모양처, '바른생활 우먼'을 향한 초고속 일취월장 변신을 거듭했다. 내 열정은 어느새, 어떻게 해야 갈비찜이 질기지 않게 된다더라 하는 걸로 바뀌었다. 내 남편이 결혼한, 활화산 같은 여자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한눈에 그를 사로잡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그녀는 '외출중'이었다"라고 쓴다. 자, 그 불륜에 덧씌워진 편견과 오해를 제쳐놓고 한번 솔직하게 그 안팎을 들여다보자. 불륜에는 지상에 이룬 천국이라는 '결혼'에 상존하는 건조한 관계, 잦은 말다툼, 퉁명스러움, 돈 걱정, 설거지, 쓰레기 버리기, 의무감이 지배하는 섹스 따위가 없다. 대신에 감미롭고 낭만적인 '섹스, 열정, 음식, 술, 기쁨, 권태'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마른 천국을 뒤로하고 '불륜'이라는 지옥 속으로 뛰어든다. 혼자 있는 것도 끔찍하지만 의무와 관습으로 얽힌 관계 안에서 고된 노동과 메마른 삶을 되풀이한다는 것도 끔찍하다. 여자에게 불륜은 하나의 출구, 즉 남성중심적 윤리체계란 영토에서 탈주하기다. 그것은 '윤리의 부정'이 아니라 이전에 없었던 새 윤리의 생성이다. 견고한 윤리적 지층의 균열이고, 떨어져 나옴이며, 마침내 배타적 성의 독점에서 탈영토화하기다. 더 이상 '불륜이란 없다'. 자유로운 의사와 상호 동의에 바탕을 두고 규범과 제도 바깥에서의 관계 맺기고, 다른 윤리가 생성되고 있을 따름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비난하지만 사랑의 한 형식인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자기 스스로에 기초해 있고, 사적인 감정과 열정을 반영한다는 점,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타자에게서 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오늘날 일부일처제 결혼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기는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남자와 여자의 기대수명이 늘고, 사랑의 준칙(準則)들은 과거에 비해 느슨해졌거나 무뎌졌다. 따라서 이 주관적 입법자의 권력이 과거와 같이 힘차게 우리의 몸과 의식을 묶어두지 못한다. 사랑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자유, 구원, 영원한 애정―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늘 지연되고, 그래서 '사랑' 안에서 사람들은 늘 메마르고 굶주린 상태다. 지금-여기에서의 사랑은 항시 양성 간의 숨 막힐 듯한 긴장과 '전쟁 중'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상대에게 더 많은 자유를, 더 많은 행복을, 더 많은 자기실현의 기회들을 요구하지만, 사실은 상대도 메마르고 굶주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내가 그에게 요구했듯이 그도 내게 같은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 넓은 지평이 아니다. 그것의 질료적 요소인 감정이나 열정들은 배타적이고 용렬하며 이기적이고 부당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의 지평은 좁고 특별하며, 나와 너의 작은 세계로 이루어지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이 배타적이고 누가 봐도 이기적이며, 논리상 부당함과 잔인함 사이의 어디쯤엔가 위치해 있으며 독단적이고 법의 범위 밖에 있다."(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오늘날의 결혼은 '침몰하는 배'다. 그 배의 승선자들은 침몰의 상황 속에서 배와 함께 수장되기보다는 바깥으로 뛰어나가 살기를 원한다. 배 안에서만 머물기로 계약을 맺은 사람이 그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계약을 깨는 행위이다. 아직까지 '불륜'이란 결혼에 대한 위반이다. 그래서 금지되는 것이고, 그 위반에 대한 페널티가 따른다. 분명한 것은 어떤 금기와 위반에 대한 벌칙이 있다하더라도 인류가 지구 위에 존재하는 한 불륜은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종의 90%, 그리고 포유류의 97%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난교를 한다. 단지 3%만이 하나의 짝하고 사랑을 나눈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의 본성을 안다면 문명화된 인류 사회에서 그토록 많은 불륜이 생기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불륜을 저지르며 남성과 여성은 '정상적인' 결혼을 함으로 인해 이미 막 내리고 만 가능성을 살리고 싶은 것이다. 여자가 되살리고 싶어하는 막 내린 가능성은 자율이요, 남자에게는 친밀함이다."(루이즈 디발보, 앞의책) 그렇다. '오직 한 사람하고만 잔다'는 건 이상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사람들은 결혼 바깥의 관계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한다. 게다가 "불륜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가 시험에 들게 하며, 의지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가 묻는다. 이들 불륜의 면면―동경, 상실, 욕망, 자율, 슬픔―은 적어도 내 경험으로 볼 때 인간 영혼을 단련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다."(루이즈 디발보, 앞의책) 사랑이 이상이라면 결혼은 현실이다.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 샛길이 숨어 있다. 그게 바로 불륜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샛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불륜에 빠진 사람은 자기 안의 이기심, 욕망, 파렴치함에 굴복해서 육체의 쾌락에 탐닉한다. 그렇다고 불륜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모두 이타주의, 숭고함, 높은 도덕성의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사는 것은 아니다. 뜻밖에 남편의 불륜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루이즈 디발보는 예기치 않은 그 난관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서 거듭난다.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2010.12.07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알레산드로 바리코, '비단', 김현철 옮김, 새물결, 2006
▲ 롤로 메이, '사랑과 의지', 박홍태 옮김, 한벗, 1981
▲ 루이즈 디살보, '불륜, 오리발 그리고 니체', 박에스더 옮김, 산해, 2006
/ 2022.09.0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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