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9) 이상(李箱)

푸레택 2022. 9. 7. 11:25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9〉 이상(李箱)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9〉 이상(李箱)

소외·불행속 탈근대 꿈꾼 '한국문학의 스캔들'[세계일보]올해는 이상(1910∼1937·사진) 탄생 100주기를 맞는 해다. 근대의 들머리에서 태어나 불과 27살에 요절한 천재작가 이상. 태어난 지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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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불행속 탈근대 꿈꾼 '한국문학의 스캔들'

올해는 이상(1910∼1937·사진) 탄생 100주기를 맞는 해다. 근대의 들머리에서 태어나 불과 27살에 요절한 천재작가 이상. 태어난 지 100년, 그리고 죽은 지 70년이 지났어도 이상 신드롬은 여전히 뜨겁다. 식민지 근대 현실이라는 최저낙원(最低樂園)에 불시착한 이상은 허물을 벗고 날마다 젊어지고 강해진다. 일인칭 독백 소설인 '날개'에서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라고 했던 이상은 20세기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근대 초입에 태어난 이상이건만 제 심혼을 억압하는 근대의 규율과 습속들을 부정하고 예술과 그 가장자리에서 바글거리는 향락들을 탐닉하는 길로 나아간다. 소년은 낯빛이 희고 말수가 적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체조를 싫어하던 소년은 자라나서 이 나라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이 되었다. 그 소년이 바로 이상이다. 그가 경성고공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일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뒤론 카페를 경영하고 삶의 권태에 스스로를 방기하며 퇴폐적 연애에 빠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상은 근대의 '특이점'이다. 이는 이상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가동되는 근대 권력이 뿜어내는 표준화라는 억압과 식민지로 전락한 모국 조선의 구태와 모순들의 억압에서 튕겨나간다는 뜻이다. 이상은 말 그대로 제 삶을 짓누르는 이중의 억압에 반발하며 '튕겨' 나간다. 이상은 경성고공에서 수학·건축학·물리학 따위의 근대 학문을 자양분 삼아 제 인식을 키우고 사유의 폭을 넓혔지만, 근대가 숙명으로 안고 있는 한계와 모순들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부정하면서 그것을 넘어가고자 했다. 근대 '너머'를 꿈꾸었기에 근대에 대한 전복(顚覆) 의식이 발생한 것이다.

이상은 근대의 습속·생활·도덕·상상력의 층위에서 근대의 원리에 포획되지 않는다. 가족·사회가 부과하는 책임과 의무들, 인습적 사고방식, 당위적 행동들에 반발하고, 일탈하고, 분열하면서 멀리 달아난다. 마치 달아남만이 제 본분인 것처럼 그렇게 달아난다. 이 달아남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지층화된 근대에서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탈영토화의 결과로 이상 문학은 소수자의 문학이라는 새로운 영지(領地)에 착지한다. 당대 주류 문학에서 떨어져 나와 자극적인 이질성으로 반짝이는 소수자 문학으로 귀착한 이상 문학은 그 도드라진 이질성 때문에 당대인들에 돌팔매질 당하고 홀대를 받는다. 근대의 원경 속에서 놓고 보자면 실험과 파열, 역설과 패러독스로 점철된 이상과 그의 문학은 탈현대의 전조(前兆)였다.

우리 근대의 부실함은 우리 민족 내부의 주체 역량에서 이루어진 '직영' 근대가 아니라 '하청' 근대였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바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하청' 업체는 조선반도의 실속을 빼가기 위한 근대화를 추진한다. 그런 까닭에 이상과 그의 동료인 '모던뽀이'들이 겪은 근대는 문명과 야만, 위생과 비위생, 봉건과 자유, 부와 가난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이상한 근대였다. 애초부터 균질함을 가질 수 없던 '하청' 근대요, 껍데기만 요란한 '부실' 근대라는 한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상은 그런 식민지 근대를 헤쳐 나가다 힘에 부쳐 퇴폐와 방종의 늪으로 빠졌던가. 결국은 폐병쟁이에다 오입쟁이라는 오명을 안고 암울한 바닥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문학의 부력(浮力)으로 양명한 현실 위로 떠오른다. 시인-소설가-화가-건축가라는 멀티플레이어로 각광을 받은 이상은 아직도 우리 문학에서 희유의 천재로 회자되고 있다. 식민지 근대의 절망과 질병의 고통을 빨아들여 피어난 그의 시와 소설들은 잉걸불보다 더 화사했으나 정작 삶은 때깔이 나지 않는 잿빛의 우중충함에 감싸여 있다. 이상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이리하여 나의 종생(終生)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어(終生語)는 끝나지 않았다"('종생기')는 그의 유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상 탄생 100주기를 맞아 그의 세대가 겪은 근대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다시 한번 그의 삶과 문학을 돌아보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작소(鵲巢)' 이상이 태어난 해와 경술국치의 해가 겹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일 터다. 그럼에도 이상의 생애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 봉건 왕조국가의 멸망과 더불어 시작했다는 태생적 한계에 고착된다. 망국민이라는 신분에서 비롯된 무국적의 내면화는 한 개별자의 선택을 넘어서서 강제성으로 그의 삶을 포섭하고 물들인다. 이상이 평생을 짊어진 불건강(不健康)과 자멸의식, 시대와의 불화, 퇴폐적 자기 방기, 게으름과 방종은 그 불가피한 한계와 인과관계에 놓인다. 구한말 경성에서 빈민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의 협착 속에서 운신의 폭이 좁은 부모들이 어린 그를 백부에게 양자 입양시킴으로써 비자발적인 소외와 불행으로 물든 식민지 근대인의 내면이 탄생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의 내면에는 이런 가족사가 낙인찍은 정신적 외상이 생에 대한 환멸과 불행을 촉발시키는 원체험으로 뚜렷하다.

◇화가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얼굴. '친구의 초상'(1935년 작)이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에서 구본웅은 반항적인 예술세계를 펼쳤던 이상의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분명 제국의 식민지 수도인 경성에서 태어났건만 이상에게는 고향이 없다. 위조된 모던으로 분칠한 경성은 그의 본적지는 될 수 있지만 고향이 될 수는 없었다. 백부 슬하로의 돌연한 위탁 양육에서 빚어진 친부모 상실과 원초적인 실향자 정서는 이상 내면에 소외의 정서와 불행을 오염시키는 줄기세포와 같은 그 무엇이다. 이런 소외의식과 불행의 생래화는 개별자의 극소화된 정신적 환경으로 귀착하는 게 옳다. 하지만 이런 불행은 식민지 근대 안에서 동시대인들에게 감염력 때문에 개별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시대적 보편으로 정치문화사회의 층위에서 간주관적(間主觀的)으로 연동하며 당대인의 내면에게 삼투한다. 강릉 김씨의 혈통을 이은 김해경은 제 태생적 한계가 방출하는 도저한 불행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본성과 무관하게 '이상'이라는 심리적 가장(假裝)과 가면(假面)의 차용이 불가피했다. 그의 운명에 착색된 이 따위 비운의 '다름'과 불행의 '타자성'은 한국문학에서 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모더니즘의 문학의 기호로 호명되는 '천재 이상문학'을 떠받치는 동력이다. 이상의 천재성은 번개와도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렇게 이상(李箱)은 '이상(異常)한 가역반응(可逆反應)' 속에서 기상천외한 내면 광채를 뿌리는 이상(異常)이자 이상(以上)으로 평지돌출한다.

이상은 "나는 추호의 틀림도 없는 만 25세와 11개월의 홍안 미소년이다. 그렇건만 나는 확실히 노옹(老翁)이다"라고 썼다. 백부에게서 상속받은 유산으로 청진동에 다방 '제비'를 개업하고 황해도 배천 온천의 기생집에서 작부 노릇을 하던 금홍을 불러와 마담으로 들어앉힌 것은 1933년 무렵이다. 이상과 금홍은 다방 '제비'에 딸린 뒷방에서 동거를 시작하는데, 이때 금홍은 21살이고 이상은 25살이었다. 그렇건만 금홍의 눈에 나이보다 겉늙은 이상은 마흔이 더 넘은 사람으로 보였다. 다방 '제비'는 당대 모더니스트 쪽의 일급문인들이 단골로 드나드는 살롱이었다.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김소운, 정인택, 윤태영, 조용만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다방 경영은 여의치 않았고, 한산한 다방의 마담 노릇에 슬슬 권태를 느낀 금홍은 옛버릇이 도져 외간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곤 했다. 금홍의 매춘을 방임하던 이상은 때로 금홍의 난폭한 손찌검에 몸을 내맡긴 채 자학을 꾀하곤 했다.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친 채 금홍이 집을 나가고 다방 '제비'는 파업을 하면서 문을 닫는다.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건져낸 소설이 '날개'다.

근대를 봉쇄하고 현대를 선점하려던 이상의 첨단의식은 작은 자아들로 쪼개지며 분열하는 언어의 파행으로 솟구친다. 연작시 '오감도'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오감도'는 이태준이 학예문예부장으로 재직하던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는데, 30회 예정이던 연재는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때문에 15회로 그친다. 독자들에게 이상은 하나의 이방인이거나 괴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타자를 이방인이나 괴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심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균열의 증거들"이고, 그 타자들은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 친숙한 것과 낯선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에서 어떻게 분열"되는지를 드러낸다. 독자들에게 모독당한 한국문학 최초의 모더니스트 이상, 탄생 100주기를 맞았지만 우리는 감히 그의 문학과 정신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상은 일찍이 저의 인생이 주단 깔지 않는 층계임을 깨닫고 박제화해 버리지만 그의 문학은 살아 있는 전설이자 흑질의 신화가 되어버렸다.

'오감도'연작시와 단편소설 '날개'의 작가 이상은 제 남루한 삶의 행적들과 그 속에 녹아 있는 불행과 절망을 질료삼아 당대 최고의 모더니즘 시와 소설로 빚어낸 식민지 시대에 돌출한 '모던 뽀이'다. 그의 등장 자체가 한국문학에는 최고의 스캔들이었다. 알쏭달쏭한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난무, 건축과 의학 전문용어의 남용, 주문(呪文)과 같은 해독 불능의 구문으로 이루어진 시들, 자의식 과잉의 내면, 도저한 퇴폐 문학의 원조, 악질적인 문법 해체, 위트와 패러독스로 점철된 국한문 혼용의 소설들. 그의 시대를 크게 앞지른 모더니즘 문학과 상궤를 벗어난 기행(奇行)들은 근대문학 사상 가장 시끄러운 소동을 빚은 스캔들의 원소를 이룬다.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날개', 이상단편선, 김주현 책임편집, 문학과지성사, 2005

● '이상 평전', 고은, 향연, 2003
●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 신범순, 현암사, 2007
● '한국현대시인연구 6 ― 이상', 김승희 편, 문학세계사, 1993
● '이상 문학연구의 새로운 지평', 신범순 외, 역락, 2006

/ 2022.09.07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