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5) 소비

푸레택 2022. 9. 6. 21:16

[장석주의 인문학 산책] <15> 소비 (daum.net)

 

[장석주의 인문학 산책] <15> 소비

제품이 사회적 지위·인격 규정.. 브랜드와 동일시화 현상 불러우리 몸은 50조개의 세포를 갖고 있다. 이 각각의 세포들에는 23쌍의 똑같은 염색체가 들어 있다. 206개의 뼈와 640개의 근육, 그리고

v.daum.net

제품이 사회적 지위·인격 규정… 브랜드와 동일시화 현상 불러

우리 몸은 50조개의 세포를 갖고 있다. 이 각각의 세포들에는 23쌍의 똑같은 염색체가 들어 있다. 206개의 뼈와 640개의 근육, 그리고 1360g의 뇌와 2720g의 피부와 같은 생물학적 형질로 이루어진 '물질'로써 사람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가지의 숭고한 목적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이러저러한 욕망과 지각, 감정, 선호라는 심리적 활동의 범주 안에서 관계를 만들고 그 다양한 관계 위에서 삶의 형태가 결정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필품이라는 '물질'들의 필요 속에서 산다. 더 많은 물건들을 사들여서 먹고 쓰는 '소비자'로 평생을 산다. 제품의 구매에는 돈이 들어가고 그래서 돈을 벌려고 열심히 일을 한다. 아울러 일하는 동안에 생긴 수고와 피로의 보상을 위해 물건들을 사들이고, 다시 그 물건들을 사들이는 비용을 벌려고 일하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우리를 더 향기롭고 우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건강한 신체와 우리 내면의 숭고성들, 즉 착한 마음씨, 유머, 예민한 감성, 높은 지능들이다. 어리석은 소비주의에 낚이지 않으려면 윤리적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사진은 최신 아이폰을 개통하기 위해 대기 중인 예약구매자들.세계일보 자료사진

이 악순환이 피워내는 것이 '불행에의 도취'(마르쿠제)다. 소비자본주의 세계에 포섭되어 있는 우리 삶에 이 불행에의 도취를 불러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핵심적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안의 다양한 '욕구들'이다.

우리의 '욕구'는 다양한 위계를 갖는다. 첫째는 결핍 욕구들이다. 결핍은 일종의 비대칭, 불균형이다. 우리에겐 비대칭과 불균형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대칭과 균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비대칭과 불균형이 생겨날 때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이것을 해소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 범주에 드는 욕구에는 생리적 욕구들이 있고, 그 위에 안전 욕구, 다시 그 위에 사회적 욕구, 최상위에 자존 욕구가 있다. 숨 쉬고 먹고 자려는 욕구는 생리적 욕구들이다. 포식자, 기생충, 천적과 같이 나를 공격하려는 적들에게서 자신의 몸과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구가 안전 욕구다. 먹고 마시고 잠자리를 구하는 일에서 내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가족, 친구, 배우자의 관계를 더 두텁게 하려는 욕구는 사회적 욕구다. 인정과 지위와 명성을 구하는 욕구는 자존 욕구다. 두 번째로 결핍보다 상위에 초월 욕구들이 있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익혀서 기회와 생존에 불리한 위험을 회피하려는 인지적 욕구, 살기 좋은 땅을 찾고 아름다운 짝을 찾으려는 심미적 욕구, 제 유전적 자질 중에서 상대에게 최고의 짝이 될 수 있는 가치를 끌어내 뽐내려는 욕구, 즉 제 잠재력 중에서 사회적으로 꽤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 입증하려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

우리가 다양한 욕구를 분출하며 '짝 고르기'를 하고 생존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 이 '물질적 생태환경'이 바로 소비자본주의의 세계다. 우리 각자는 이 바다에 사는 플랑크톤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진화소비자심리학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연구한 제프리 밀러가 말하는 바다. "우리는 왜―일하고, 사고, 탐내는―소비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그 물음에 답하자면, 사람이 "이미지와 지위"가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사회집단에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매하는 상품과 서비스는 나의 즐거움보다는 타인의 호의를 사기 위함이다. 수공작의 화려하게 펼쳐진 꼬리나 멋진 포르셰를 모는 것은 짝을 유혹하고 친구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 유리하다. 그러니까 수공작의 꼬리나 포르셰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제 더 우아한 유전자, 남보다 더 화사한 건강, 훌륭한 사회 지능 따위의 "한 개체의 형질과 자질을 알리는, 다른 개체가 지각할 수 있는 신호들"(제프리 밀러, '스펜트')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고, 왜 그것을 사는가? 우리의 소비 행위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소비의 관습이라는 형식으로 우리 몸에 각인된 갖가지 브랜드들은 우리에게 자아 정체성의 근거를 준다. 우리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쓰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일이다. 제품의 구매자는 제품의 실질적 효용가치만이 아니라 제품이 내재화하고 있는 무형적 가치들, 즉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 의미, 정서를 사들인다. 그 제품이 시장에서 갖는 차별성과 위상은 곧 그것을 구매한 사람의 취향과 느낌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격을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소비자는 곧 그가 쓰는 브랜드 제품과 동일시되는 현상이다. "나는 한 입 베어 먹은 사과이고, 말을 탄 폴로선수이며, 눈 덮인 산이기도 하다. 나는 직장 사람들이 나를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사람으로 여겨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애플 맥을 쓴다."(닐 부어맨, '나는 왜 루이뷔통을 불태웠는가?') 한 입 베어 먹은 사과, 말을 탄 폴로선수, 눈 덮인 산 등은 널리 알려진 브랜드 제품에 붙어 있는 로고들이다. 이 로고가 말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쓰는 제품들에 붙은 기업의 로고를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것의 본질은 노예 낙인이다. 노예의 소유주들은 제 노예의 이마나 어깨에 제가 그것의 주인임을 인식시키는 낙인들을 찍었다. 오늘날에는 제품에 붙은 로고들이 그 노예 낙인의 대체적 기호가 되고 있다. 노예 상인들은 노예의 이마나 가슴팍에 불로 달군 쇠로 낙인을 찍었다. 우리가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자랑스럽게 쓰는 브랜드는 그것이 곧 우리의 소유주임을 증명하는 우리 신체에 찍힌 낙인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소비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혀주고, 우리에게 자아 정체성을 만들어준다. 우리의 욕망과 기호가 소비행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행태가 우리의 욕망과 기호를 결정한다. 어떻게 이런 왜곡이 일어났는가? 소비자본주의 세상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조종의 첫 번째 수단이 제품 광고다. 소비자본주의 세계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광고라는 거울에 둘러싸인 배우이자 관객"(닐 부어맨, 앞의 책)들이다. 기업들은 제품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비자들에게 팔기 위해 연구한다.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품의 마케팅, 광고, 홍보, 시장조사, 디자인, 브랜딩, 포지셔닝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사람의 본성과 유전자 형질까지 제품에 맞춰 바꾸려고 든다. 소비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마케팅'의 표적들이다. "마케팅은 주관적인 기쁨, 사회적 지위, 로맨스, 생활방식을 바탕으로 소비자에게 나르시시즘을 불어넣는 사이비 심령술을 조장하고, 그럴 때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연상 이미지가 제품의 물리적 질보다 더 중요해진다. 제품과 소비자의 갈망을 연결시켜서 제품을 그것의 물리적 형태가 보증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소비자에게 가치 있게 보이게 만드는 것, 이것이 광고와 브랜드화의 핵심이다."(제프리 밀러, 앞의 책)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 우리의 습관과 의견을 지능적으로 조작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주인'들이다.

소비자본주의 세상은 물질로 뒤덮여 있는 물질의 천국, 즉 물질주의적 세계일까? 보통은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다. "소비자의 욕망에서 이윤을 얻는 마케팅으로 돌아가는 세상은 '물질주의적' 세상으로 '생필품화'할 리가 절대 없다. 차라리 제품도 소비자도 물질적인 질을 지닐 필요가 없는 가상현실이 되기 쉽다. 마케팅의 논리적 정수는 조야한 물질주의가 아니라 '매트릭스'나 '세컨드라이프'가 보여주는 유혹적인 비물질주의다."(스펜더, 위의 책) 아이팟, 프라다 백, 티파니 목걸이, 아우디를 사들이고, 보톡스 주사, 유방성형술 따위를 하는 데 지갑을 열라고 권하는 소비자본주의가 위조해내는 '천국'은 물질주의가 아니라 비물질주의다! 결국 이 '유혹적인 비물질주의'가 우리를 소비 나르시시즘으로 빠뜨리게 될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의 징후는 이기심, 거만함, 예외성, 특권의식, 예찬 추구, 성공 환상, 과대망상, 피해의식, 무쾌감증, 정서불안 따위다. 소비주의에 낚인 사람들은 소비 나르시시즘의 나락에 떨어져 오로지 자기만이 예외적이고 특권적으로 중요하고, 자기만이 힘, 총명함, 성적인 매혹을 지녔다는 망상 속에서 산다. 이 망상 속에서는 제 실패나 실망은 언제나 내가 아닌 외부의 잘못이다. 소비가 주는 기쁨의 유효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결국 감각이 마비된다. 그러면 소박한 즐거움에는 반응하지 못하게 되어 더 강한 자극을 찾아 몸을 던진다. 무쾌감증에서 벗어나려고 코카인이나 마리화나가 주는 환각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나르시시즘의 수혈이 끊길 때 정서불안과 피해망상과 같은 금단현상에 빠질 수도 있다.

제품들이 그 소유주의 부와 지위와 취향을 드러낸다고 말하지만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그렇다. 제품들은 일시적인 만족과 자기 과시적 도취를 준다. 이것들이 마음의 평화나 존재의 안정성에 기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타고난 유전적 형질을 바꾸지도 않는다. 우리를 더 향기롭고 우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건강한 신체와 우리 내면의 숭고성들, 즉 착한 마음씨, 유머, 예민한 감성, 높은 지능들이다. 나의 자아는 내가 가진 제품들의 총합이 아니라 내면 형질들, 이미 실현된 것들과 미래의 가능성, 숭고한 꿈, 인류공동체를 위한 원대한 기획들을 향한 노력들의 총합이다. 당연히 어리석은 소비주의에 낚이지 않으려면 윤리적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제품을 살 때 브랜드도 보다도 먼저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가를 살피자. 그 생산자에게 정당한 임금이 돌아갔는가를 따져보자. 식품을 살 때는 먼 곳에서 온 것보다는 지역에서 나온 것을 사먹자. 대형 마트의 냉장고에서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들은 방부제를 뒤집어쓰고 외국에서 수입된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직거래가 이루어지는 재래시장이나 생활협동조합에서 파는 제 지역의 생산품들이 몸에 이롭다. 공정무역으로 거래되는 제품을 사는 게 가난한 제3세계 사람들을 돕는 일이다. 커피, 설탕, 올리브유, 초콜릿, 의류 따위를 살 때 그것이 공정무역 제품인가를 따지자. 아울러 같은 제품이라면 친환경 기업, 인권경영 기업을 하는 제품을 구매하자. 이것이 건강한 지구 생태 환경을 위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소비와 마케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소비자본주의 세계는 지구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과 에너지 흐름을 지배한다. 놀라워라, 그 결과 2000만 분의 1의 행운을 거머쥔 인간이라는 단일 종이 수만종의 생물들이 함께 나눠 써야 할 지구 생물권의 연간 생산량의 절반을 쓸어간다. 생물학적 필요 이상의 낭비적 소비는 지구 생태의 건강함을 위해서라고 피해야 하는 추악이다. 고삐가 풀려버린 자기과시의 낭비적 소비의 고삐를 다시 틀어쥐고 통제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생태미학의 지속적 실천, 그리고 윤리적 소비의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그 추악과 절대 악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글=장석주 시인세계일보 2010.10.26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제프리 밀러, '스펜트―섹스, 진화 그리 고 소비주의의 비밀', 김명주 옮김, 동녘사이언스, 2010

● 닐 부어맨, '나는 왜 루이뷔통을 불태웠는가?', 최기철·윤성호 옮김, 미래의창, 2007
● 켈시 팀머맨, '윤리적 소비를 말한다', 김지애 옮김, 소울메이트, 2010
● 천규석,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 실천문학사, 2010

/ 2022.09.06 옮겨 적음